[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38>] 술은 독이다
입력 2022.09.10 17:19
수정 2022.09.10 17:20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38화 술은 독이다
하루는 시내의 한 신경정신과에 가보았다. 초로의 의사는 한종탁이 기재한 문진표를 슥 훑어보더니 차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치료 받으면 술 끊을 수 있습니까?”
“끊을 수 있죠.”
“약 먹고 하면 술 생각이 아예 안 나는 겁니까?”
“그건 아니고요. 삼위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술 마시지 않는 환경, 술 권하지 않는 주위사람들, 무엇보다 술 마시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의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의사의 말을 들어보니 한종탁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의사가 술을 끊게 해주겠지 하는 기대감을 안고 내원했는데 막상 의사의 역할은 없고 자신의 역할만 잔뜩 있었다. 한종탁은 간호사가 주는 약 봉지를 가지고 나오다가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주말엔 대나무가 세워진 집을 찾아갔다. 회사 근처 철학관이었는데 박수는 술 귀신이 붙어있어 굿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종탁은 한번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는 그 집을 빠져나왔다. 굿하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동네방네 소문나도록 징을 쳐댈 텐데 무엇보다 창피해서 못할 노릇이었다. 한 동안 거리를 걷다보니 자유시장 앞이었다. 뉴욕과 자매도시가 아닌데도 자유의 여신상이 실물 대비 삼십분의 일 크기로 제작되어 시장 입구에 서있었다. 시장 안에 들어서자 거기에도 철학관이 눈에 띄었다. 한종탁은 나무문짝 미닫이를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방 안은 전체가 붉은 색깔로 치장되어 있었다. 천정 가득 붉은 연등과 부적이 엿가락처럼 줄줄이 매달려 있고 덩치 큰 불상을 모셔둔 신단은 위용이 넘쳐흘렀다. 박수는 신단 아래 방바닥에 비스듬히 드러누워 있다가 한종탁을 보자마자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낮술을 했는지 얼굴에서 붉은 빛이 감돌았다. 한종탁이 술 때문에 왔노라고 시간 있으면 관상 좀 봐달라고 하자 박수가 우선 막걸리나 두어 통 사오라고 말했다.
한종탁은 아무런 의심 없이 가게에서 막걸리를 사와서는 박수와 주거니 받거니 하며 대갈일성을 기대했다. 하지만 박수는 오로지 술만 탐할 뿐 상담을 해줄 생각일랑 아예 없는 듯했다. 기다리다 못해 한종탁이 먼저 관상 좀 봐주십사 말을 꺼내놓으니 박수가 휴일엔 업무를 보지 않는다며 평일에 오라는 것이었다. 한술 더 떠 박수는 오늘 술값을 복채 선불로 하고 이왕이면 막걸리나 좀 더 사다 달라는 것이었다. 한종탁은 흔쾌히 그리하겠다고 말하고 나와서는 그길로 친구를 찾아가 질펀하게 술을 마셨다.
지금까지 음주와 함께 이십여 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한종탁이 금주선언을 한 것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지만 대개 그 기간이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그랬는데 무려 3개월 동안이나 금주한 적이 있었으니 그건 한종탁이 생각해도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재작년 한종탁은 일박이일 일정으로 회사에서 연수를 가게 되었는데 당일 ‘화합의 밤’ 시간에 들뜬 기분을 가누지 못하고 꽤 많은 술을 마셨다. 마치 주인공이나 되는 것처럼 행사장 안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며 술잔을 돌렸더니 결국 만취가 되고 말았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한종탁은 술에 취해도 가급적 티 나지 않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기 때문에 남들의 제지를 피해 다른 주취자보다 한 병이라도 더 마실 수 있는 전략적인 음주가였다.
다음날 한종탁은 술이 덜 깬 채로 아침을 먹으러 가 해장술이랍시고 또 소주를 꺼내 마셨다. 술주정이 따라붙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집에 돌아와 진땀을 흘리며 기억을 더듬어 보니 월요일 출근해서 직원들 얼굴 볼 일이 까마득하게 여겨졌다.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정도껏이라야 하는데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한종탁은 이번엔 확실히 술을 끊어보겠다고 다짐하며 휴일 내내 소망과 의지를 담은 문구를 지어내 매직으로 A4용지 몇 장에 캘리그래피 글씨를 써보았다.
술은 독이다. 술은 가정파괴범이다. 맑은 이슬도 뱀에게서는 독으로 나오듯 알코올중독자에게 술은 독이 되어 돌아온다. 음주라는 하위쾌락을 위하여 인생화평이라는 상위쾌락을 포기할 것인가.
한종탁은 아포리즘 같은 경고 문구를 캘리그래피로 담아낸 종이를 여러 도형으로 오려서 코팅을 하고 천정에 모빌처럼 매달아 놓았다. 동그라미, 세모, 네모 등의 도형이 움직일 때마다 각기 다른 경고문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장차 닥쳐올 자신의 음주본색을 막기에 역부족이겠다 싶었다. 그래서 한종탁은 아예 신분증처럼 지갑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의지를 북돋을 수 있는 것을 만들어보자고 작정했다. 바로 ‘알코올중독 환자증’이었다.
성명 한종탁. 생년월일 74년 4월 1일. 위 사람은 알코올중독환자로서 절대 금주를 취해야 하므로 이 자에게 술을 권하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알코올중독환자관리법 제4조 제1항에 의거 엄중 처벌됨을 알려드립니다. 2016년 4월 1일. 한국알코올중독환자연합회장.
환자증에 사진을 스캔해 넣고 회장 직인까지 벌겋게 찍어 놓으니 영락없이 연합회에서 발급한 신분증이 되었다. 그러자 노지연이 펄쩍 뛰었다. 남세스럽긴 하지만 방안에 설치해 놓은 건 그나마 용납해 주겠는데 환자증은 절대 안 된다며 압수했다. 만일 한종탁이 술에 취해 길거리에 쓰러져 있으면 진짜 알코올중독환자로 오인되어 쥐도 새도 모르게 시설에 실려 갈 것이란 게 노지연의 우려였다. 한종탁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노지연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종탁이 금주의지를 담아 정성껏 만든 모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3개월 만에 깨끗이 철거되고 말았다. 모빌은 히스테릭한 노지연의 손아귀에 거칠게 뜯겨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그날은 한종탁이 인사불성 되었던 날이었다.
이후로도 한종탁은 만취하면 술 끊겠다 선언하고 노지연의 성화가 잦아들만하면 술잔을 다시 잡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는 사이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도대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김석규가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한종탁은 김석규를 꼭 빼닮아 술친구들로부터 도플갱어라고 불렸기 때문에 김석규가 입원했다는 건 머지않은 미래에 한종탁 역시 그리될 수 있다는 경고나 다름없었다.
“석규 씨처럼 안 되려면 술 끊어라!”
노지연이 도끼눈을 뜨고 말했다. 한종탁은 최대한 순종적인 눈빛을 내비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노지연과의 약속만으로 다짜고짜 술을 끊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껏 한종탁은 깨우친 바가 있어서 술을 끊은 게 아니라 만취와 주정에 뒤따르는 후유증과 책임을 모면하기 위하여 면피성 금주를 해왔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석규의 입원이 충격적인 일이긴 해도 그게 한종탁의 금주모드를 작동시킬 만큼 강력한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었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