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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37>] 음주와 금주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2.09.07 14:27
수정 2022.09.07 10:27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37화 음주와 금주


한종탁이 처음으로 마셔보는, 콜라에 타 마시는 소주는 술이 아니었다. 그냥 알코올이 함유된 음료수였다. 한종탁은 넙죽넙죽 받아먹다가 달착지근한 술맛에 매료되어서 아예 자작으로 마셔버렸다.


“이제 그만 일어나지.”


십장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하지만 한종탁은 이미 발동이 걸려버린 터라 십장의 말이 썩 달갑지 않았다.


“한 병만 더 마시죠.”


한종탁이 편하게 앉은 자세로 말하자 십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일꾼들도 십장을 따라 일어섰다. 십장이 영 마뜩찮은 표정으로 말했다.


“한군. 내일 와서 일당 받아가게.”


“일당이라뇨?”


“일 그만 두라는 말이야.”


“왜요?”


그러나 십장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나가버렸다. 한종탁이 십장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이유를 대라고 다그쳤다. 술 잘 마시고는 느닷없이 돌변한 십장의 태도에 당혹스럽다기보다는 울화통이 터졌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제 갈 길만 가는 십장을 따라 계속 걷다보니 어느 샌가 망경동 육거리였다. 십장이 어느 나무대문을 밀고 들어가서는 빗장을 질렀다.


“이봐요. 이유를 대란 말이야!”


한종탁은 취기에 흥분까지 더해져서 이제 제정신이 아니었다. 손과 발을 다 써서 대문을 차고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한종탁은 사람들의 기세에 눌려 슬그머니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튿날 눈을 떠보니 간밤의 기억이 아슴푸레했다. 십장의 나무대문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다가 어느 술집에 혼자 들어간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어떻게 귀가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머리를 싸매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간밤의 일이 조금씩 떠오르긴 한데 마치 꿈의 조각들을 맞춘 것처럼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한종탁은 술이 덜 깬 상태로 주섬주섬 작업복을 챙겨 입고 공사현장에 나갔다.


십장과 일꾼들이 양옥 주택의 옥상에서 한창 거푸집에 콘크리트를 채워 넣고 있었다. 십장은 한종탁이 나타나자 일손을 멈추고 옥상을 내려와 근처 막걸리 집으로 데려갔다. 십장은 노파에게 막걸리 한 주전자를 달라고 해서는 큰 대접 둘에다 가득 따랐다. 십장이 목젖이라 잘못 불리는 갑상연골을 껄떡거리며 막걸리 한 대접을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켰다. 시원하게 쭉 들이키고는 상남자처럼 두툼한 손으로 입가를 훔치는 십장을 보며 한종탁 역시 따라해 보았지만 숨이 차서 반밖에 마실 수 없었다.


“한군. 일도 열심히 하고 다 좋은데 술을 좀 많이 마시더군. 그 동안 수고했어.”


십장은 일당이 든 봉투를 한종탁에게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종탁은 십장이 부어준 막걸리를 마저 마시고 부끄러움에 겨워 그 길로 완행버스를 타고 시골 외가로 숨어들었다. 한종탁 잠수 역사의 시작이었다.


일 년을 휴학하고 난 이듬해에도 입대영장이 곧바로 나오지 않아 한종탁은 하는 수 없이 복학부터 해 놓고 영장을 기다렸다. 본격적으로 술을 마신지 불과 삼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한종탁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똥을 누면 벌건 피가 섞여 나왔고 장이 배배 꼬이는 건지 무시로 복통이 찾아왔다. 그래도 한종탁은 병원에 가지 않았다. 아니 갈 시간이 없었다. 입대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술 마시는 데에만 써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한종탁은 복통과 혈변을 이겨내며 열심히 술을 마셨다.


한종탁의 복통과 혈변은 입대 이후 이병, 일병을 거쳐 상병 계급장을 달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번은 전차의 포탑 위에서 망중한을 즐기다가 복통이 찾아오는 바람에 배를 움켜쥔 채 상판으로 굴러 떨어진 적도 있었다. 상병이 된 한종탁은 군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몸도 꽤 가벼워지고 좋아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뿐만 아니라 여건상 술을 마실 수 없는 상황이 효자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었다. 덕분에 제대하고 나니 한종탁의 주량은 입대 전보다 훨씬 더 늘어나 있었다.


이십대 중후반 시절의 한종탁이 친구들을 만나서 하는 일이라곤 술 마시는 것 밖에 없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는 게 아니라 술집으로 통했다. 인생도 문학도 예술도 연애도 술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맛난 음식이 술이었고 최고로 재미난 일이 술 마시는 것이었다. 더욱이 술을 많이 마시면 대장부로 각광 받던 시절이었는데 거기에 허풍과 객기를 부려서 장식해 놓으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실수하는 건 비일비재하다 못해 거의 일상적이었다. 사실 사회통념이 취중실수에 관대하니까 한종탁이 여태 무사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도태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간밤에 술을 마시고 귀가해서는 곯아떨어진 채 자고 있는데 누군가 한종탁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한종탁은 비몽사몽간에 잠을 깨운 사람이 시키는 대로 안방을 나와 마루에 걸터앉았다. 한종탁이 담배 한 가치를 달라고 하자 잠을 깨운 사람이 한종탁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흡사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 지나간 것 같았다. 한종탁이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처음 보는 중년의 부부가 서 있었다.


중년의 남자가 잔뜩 화가 나서 말하기를 주거침입으로 경찰을 부를까 했지만 보아하니 젊은 사람이 술을 많이 마셔서 실수를 한 것 같으니 자식 키우는 부모 입장으로 최대한 관용을 베풀어서 참는다고 했다. 이에 한종탁은 거듭 용서를 구하기를, 아마도 어릴 때 살던 집의 대문과 구조가 너무 닮아서 취중에 이런 큰 실수를 한 것 같다며 연방 머리를 조아리면서 그 집을 빠져나왔다. 물론 그때 술 끊는다고 작심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한종탁의 음주와 금주는 청실과 홍실처럼 세트로 붙어 다녔다. 이른바 ‘떡’이 되고나면 한종탁이 아내 노지연에게 온갖 잔소리는 다 듣고 금주했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마시기를 반복했다. 그 며칠이란 건 노지연의 화가 사그라지는 기간이었다. 한종탁은 노지연의 눈치나 보며 술 마신다는 부끄러움으로 영혼까지 비루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술 앞에선 자괴감보다 음주의 기쁨이 늘 한발 앞서 나왔다. 이런 게 알코올중독이 아닌가 싶었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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