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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캐릭터탐구㉘] 여자 옷 입는 남자들(아직 최선에서 대니쉬 걸)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입력 2022.04.04 08:27
수정 2022.04.04 08:27

영화 '대니쉬 걸' 스틸컷 ⓒ이하 유니버셜 픽쳐스 제공

20세기라 그랬을까. 1990년대 초반 일본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키친’에서 여자 옷을 입는 남자를 접했을 땐 충격이었다. 유이치의 엄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내가 죽은 후 더는 누군가를 사랑하기 힘들 것 같고 아이에게 빈 엄마 자리를 메워 주고파 여자가 되기로 결심한 아빠였다는 사실은 자못 감동적이었다.


배우 안석환이 연기한 크로스 드레서 ⓒ출처=네이버 블로그 film1982

최근 드라마 속에서 여자 옷 입은 남자를 연이어 봤다. 지난 1월 종영한 TV조선 드라마 ‘엉클’에서 배우 안석환이 연기한 ‘장익’이라는 인물은 작은 바(bar, 술집)를 운영하는데 화장도 하고 드레스도 입는다. 스스로 느끼는 성적 정체성은 여자인데 몸은 남자로 태어난 트렌스젠더도 아니고 게이(남성 동성애자)는 더더욱 아니다. 과거 록밴드에 몸담았던 예술적 끼가 충만한 인물로, 단지 여자 옷을 즐기는 ‘크로스 드레서’일 뿐이다. 코믹 연기의 달인인데다 밝은 인상의 안석환이 연기해서일까, 전혀 위화감이나 거부감 없이 하나의 취향으로 받아들여졌다.


지난 2월 티빙(TVING)을 통해 공개된 드라마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에서는 주인공 남금필(박해준 분) 담당 웹툰 편집자 유재우(강길우 분)를 통해 여자 옷 입은 남자가 등장했다. 유재우는 유일무이하게 남금필의 잠재성을 알아보고 특유의 화풍과 메시지를 격려하는 인물이다. 처음엔 누구보다 이해심과 공감력이 크고 성정이 온화한 사람이구나 싶다.


배우 강길우가 연기한 트렌스젠더 ⓒ티빙 제공

갑자기 사라져던 그가 곱게 화장하고 빨간 원피스를 입고 등장할 때, 깨닫는다. 누구에게도 이해받기 힘든 나날을 살아왔기에 모두가 한심하게 여기는 남금필에 깊이 공감한 것이었구나. 유재우는 자신의 본 모습을 평생 감추고 살다 주위 시선 의식하지 않고 44세에 웹툰작가에 도전하는 남금필을 보며 용기를 낸다. ‘그녀’는 남자 몸에 담겨 태어났으나 스스로 여자인 트렌스젠더이고, 여자로서의 첫날 남금필을 만나러 간다.


어떠한 연유로든 여자 옷을 입은 (사회적 구별로) 남자를 드라마에서 연이어 보며 국내외 여러 작품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드라마 ‘열혈사제’의 배우 김남길처럼 범인을 잡기 위해 일시 변장한 모습이나 남자임을 감추기 위해 여장을 한 드라마 ‘녹두전’의 배우 장동윤 같은 가벼운 사례부터 좀 더 복잡하고 심오한 배경 속에 여자 옷을 입은 프랑소와 오종 감독의 영화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2014)나 톰 후퍼 감독의 영화 ‘대니쉬 걸’(2015)도 떠올랐다.


소녀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클레어와 버지니아(데이빗의 내적 자아, 오른쪽) ⓒ영화사 찬란 제공

영화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에서 데이빗(로망 뒤리스 분)은 아내가 죽은 뒤 아내의 옷을 입고 젖먹이 딸을 키운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키친’처럼 엄마의 부재를 메우려는 노력인가 싶은데 아니다. 인간의 성에 대해 정통하고 독특하고도 과감하게 표현할 줄 아는 오종 감독답게 이야기는 복잡하게 흐른다.


죽은 아내의 절친 클레어(아나이스 드무스티어 분)에게 연심이 있다. 클레어와 죽은 아내 로라(이실드 르 베스코 분)는 사실 레즈비언이었고 서로를 아꼈지만, 사회적 규칙에 맞춰 각자 결혼한 터였다. 혹시나 데이빗이 이를 알고, 로라의 옷을 입고 접근해 친밀감을 높여 클레어의 마음을 얻으려는 것인가 의심해 보는데 그도 아니다. 데이빗은 단지 여자로 꾸미기 즐기고 여자 옷을 입었을 때 더욱 자유를 느끼는 크로스 드레서다. 아니, 진정한 자아는 여성이라고 느끼는 트렌스젠더일 수도 있다. 세월이 흘러 초등학생이 된 딸의 손을 두 사람이 잡고 하교하는데, 남들 눈에는 두 여자가 아이의 손을 잡은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은 더할 나위 없이 살가운 아빠와 엄마다. 아니, 두 엄마일 수도 있다.


에이나르가 릴리가 되는 순간 ⓒ

영화 ‘대니쉬 걸’은 1920년대 덴마크와 주변 유럽국가들을 배경으로 한다. 명배우 에디 레드메인이 연기한 에이나르 베게너는 제법 알아주는 풍경화 작가이고, 아내 게르다 베게너(알리시아 비칸데르 분)는 야심은 크지만 주목받지 못하는 초상화가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는 면에서나 서로를 존중하는 면에서나 이상적 부부로 보이는데, 위기는 뜻하지 않은 계기로 만들어진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무용수 친구를 대신해 아내 게르다는 남편 에이나르에게 여자 옷을 입혀 모델로 세운다. 에이나르 안에서 무언가가 폭발한다. 알아도 모른 척 꾹꾹 눌러왔던 진실, 숨겨온 성적 정체성이 활화산처럼 터져 나온다. 처음엔 단지 여자로 꾸미는 것에 현혹됐나 싶지만, 아니다. 에이나르는 자신을 여자로 느끼며 살아왔고 잘못 타고난 남성의 몸에 혐오를 느낀다. 이를 눈치챈 게르다는 너무나 괴로워하며 중단시키려 하는데, 인생 참 얄궂게도 여장한 남편을 그림이 처음으로 주목받는다. 파리까지 진출한다. 부부의 이해와 요구가 딱 맞아떨어지며 위험한 여정은 계속된다. 에이나르는 릴리가 된다.


나를 찾기 위한 용기는 성적 정체성에만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는데, 외면도 중단도 불가능한 에이나르의 ‘본 모습을 찾겠다’는 열망이 눈물겹다. 성적 정체성이라는 내용과 몸뚱어리라는 형식의 불일치가 한 인간에게 가져오는 고통을 배우 에디 레드메인은 자신을 던져 처절하게 연기했다. ‘열혈’ 배우의 몸을 빌린 한 인물의 사투는 시공을 넘어 많은 성소수자에게 힘이 될 것이다.


입은 옷만으로 그 사람을 대접하거나 홀대하는 사회적 무례는 말할 것도 없고. 입은 옷만으로 한 사람의 성 정체성이나 사회적 성별을 구분할 수 없다. 원래 그러한데 그럴 수 없었던 과거가 있었고, 현재 역시 온전히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시대가 변하긴 변했다고 생각하는 지점은 외국영화도 아니고 국내 드라마에 크로스 드레서와 트렌스젠더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시작점에 배우의 역할은 중요하다. 배우 안석환과 강길우 배우의 열연에 고개를 숙이는 오늘이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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