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㊾] ‘청산리’ 대첩이라는 프레임
입력 2021.10.05 14:40
수정 2021.10.05 14:31
최근 언론 보도에서 종종 듣는 표현 중에 하나가 ‘프레임’(frame)이다. 프레임이란 표현은 액자, 틀 등을 의미하는데, 인지과학에서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나, 계획 혹은 행동하는 방식 심지어 이에 대한 판단조차 프레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프레임을 바꾸는 것은 이 모두를 바꾸는 것이며, 이를 재구성하는 것은 바로 사회적 변화라고 이야기한다.
압록강 유역 일대 독립군 일본군 교전 상황ⓒ아시아역사자료센터
조지 레이코프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에서 이러한 프레임을 매우 잘 분석하고 있다. 그는 이를 가리켜 ‘자신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언어를 취합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진실을 알려주면 옳은 결론을 내릴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마치 ‘진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와 같은 성경의 구절 같은 믿음이다.
그런데 이미 프레임이 형성된 이후에 진실이란 판단의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고 조지 레이코프는 이야기한다. 그는 ‘진실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그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프레임에 부합해야 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 진실은 버려진다’라고 이야기한다.
독립운동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대표적으로 ‘청산리 대첩’에 대한 것이 그렇다. 여기서 대첩에 대한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 앞에 붙어 있는 청산리라는 지역 역시 하나의 프레임으로 작용한다. 기존 우리 학계에서 이뤄지고 있는 많은 연구를 살펴보면 1920년 10월 이후에 독립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에 대해서 이른바 ‘청산리 대첩’이라는 형태로 이해하고 있다.
덕분에 청산리를 벗어난 지역에 대한 연구가 소홀해지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사실 청산리 지역에 투입된 것은 일본군 중 조선군사령부 예하 19사단을 중심으로 한 부대이다. 이 때문에 독립운동사에서도 이 부대와 전투를 벌인 김좌진, 홍범도 등의 부대를 청산리 대첩의 주역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청산리’라는 프레임 너머에도 무수히 많은 부대가 존재했다. 특히 소수분하 일대에서 무라다 중위 부대를 전멸시킨 아직 그 존재조차 확인할 수 없는 독립군 부대를 비롯하여 이번에 새롭게 소개할 압록강 너머 독립군까지 많은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점이다.
아마도 청산리 대첩 당시 압록강 일대 일본군과 독립군 간의 전투에 대해서는 이번에 처음 소개하는 것 같다. 일본군은 두만강 너머뿐만 아니라 압록강 일대에 대해서도 독립군 탄압 계획을 세우고 부대를 투입하고자 했다. 그 빌미는 청산리 대첩과 마찬가지로 10월 2일 벌어진 ‘훈춘사건’이었다.
일본군은 압록강 너머의 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해서 이른바 초토부대를 편성하여 2개월간의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때 일본군은 기병을 중심으로 부대를 편성했다. 독립군이 지형을 이용해 매우 빠르게 이동할 것에 대비한 것이었다. 이와 함께 일본군은 일본 헌병 보조원 중 2~3명에게는 조선인 복장을 입혔다. 이들에게 조선인 복장을 입힌 것은 이들로 하여금 조선인 마을에 침투 시켜 독립군을 은밀히 찾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독립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해서 압록강 너머까지 군대를 출동시켰다. 사실상 청산리 대첩의 또 다른 측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올해로 우리가 흔히 청산리 대첩이라고 부르는 독립전쟁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났다. 이제는 ‘청산리’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새롭게 1920년 독립전쟁을 새롭게 정의해야 할 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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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