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㊷] 1788년 청과 싸웠던 베트남의 저항, 낯설지 않다
입력 2021.08.17 14:01
수정 2021.08.17 12:30
정조 13년(1789년) 3월 8일, 중국에서 돌아온 동지정사(冬至正使) 이재협은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와 관련해 중요한 보고를 했다. 안남(지금의 베트남)에서 정변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안남 국왕이 청에 도움을 요청했다는 소식이었다. 청 황제는 안남 국왕의 요청에 응해 중국 전역에서 병력과 자원을 동원해 안남을 공격했다. 이재협은 그 결과 안남 국왕이 왕좌를 무사히 회복할 수 있었고,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양광 총독 손사의는 한족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모용공(謀勇公)에 봉해졌다고 보고했다.(<정조실록> 13년 3월 8일)
당시 청이 안남을 공격하기 위해 동원한 병력은 약 20만 명에 달했다. 비록 청 황제인 건륭제가 직접 안남으로 출정한 것은 아니지만 병자호란 때보다도 많은 병력이었다. 광동, 광서, 운남, 귀주 등에서 병력이 동원되었고, 중국 전역에서 식량 등 전쟁물자가 이 지역을 향해 출발했다. 건륭제 연간의 다른 여느 전쟁처럼 안남 역시 청군의 압도적 전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여겼다. 동지정사 이재협의 보고 역시 그런 예측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790년 3월 중국 사행을 마치고 돌아온 성종인은 전혀 다른 보고를 했다. 안남에서 정변이 일어났고, 청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안남 국왕의 복위를 도왔다는 것은 이재엽의 보고와 동일했다. 하지만 안남 국왕이 복위한 뒤 청군이 철수하였고, 이후에 다시 정변이 일어나 청군이 다시 안남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특히 전쟁의 결과가 이전 이재협의 보고와 전혀 달랐다. 성종인의 보고에 따르면 건륭제는 정변을 일으킨 완혜(응우옌 반 후에)가 죄를 뉘우치자 용서했다. 오히려 안남 국왕인 여유기는 인장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인심을 잃었기에 건륭제로서도 그에게 다시 나라를 세우게 할 도리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응우옌 반 후에를 안남 국왕에 책봉하고, 안남을 조선에 버금가는 예로써 대우까지 해주었다는 것이다.(<정조실록> 14년 3월 27일)
사실 청과 안남 간의 전쟁은 청의 패배였다. 당시 안남의 레 왕조는 사실상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었고, 안남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었다. 북쪽은 찐씨가 남쪽은 응우옌씨가 통치했다. 이때 남쪽의 응우옌씨 정권에 반대해 떠이썬(西山) 지역의 응우옌씨 삼형제(응우옌 반 냑, 응우옌 반 르, 응우옌 반 후에)가 저항을 시작했다. 이른바 ‘떠이썬 농민 운동’이다.
응우옌씨 삼형제는 떠이썬에서 무장 저항운동은 시작한 뒤 레 왕실의 회복을 주장하며 남쪽의 응우옌씨와 북쪽의 찐씨를 차례로 무너뜨렸다. 하지만 레 왕조의 마지막 황제라고 할 수 있는 소통제(여유기)가 권신에게 계속 휘둘리자 종국에는 레 왕조까지 멸망시켰다. 이 과정에서 소통제가 청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청의 건륭제는 이를 빌미로 안남에 군사적 개입을 시작하였다.
1788년 10월 청은 양광 총독인 손사의를 사령관으로 삼아, 군대를 편성하여 안남을 공격했다. 청군은 20만이라는 압도적인 병력을 두 개로 나누어 랑썬과 뚜옌꽝 방향으로 진군했다. 11월에는 탕롱(현재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까지 공격해 점령하였다. 소통제 역시 탕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2월 21일, 건륭제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손사의는 소통제를 안남 국왕에 책봉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청군은 대규모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 이를 빌미로 응우옌 반 후에는 소통제가 안남의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없다고 선언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한 후 북진했다. 청의 지배가 계속되면서 응우옌 반 후에를 지지하는 세력이 늘어났고, 곧 응우옌 반 후에의 군대는 10만 명까지 증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군은 소규모 전투에서 계속 승리를 이어갔다. 이러한 승리는 응우옌 반 후에와 그가 이끄는 군대에 대한 멸시로 이어졌다. 청군은 승리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 찼고, 곧 전쟁이 끝날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손사의는 탕롱에서 정월을 보낸 이후 남진하기로 하고, 정월까지 휴식에 들어갔다.
반면 응우옌 반 후에는 매우 빠른 속도로 북진을 계속했다. 그는 정월을 며칠 앞두고 하노이 인근의 땀띠엡까지 도착했다. 일부 기록에서는 이때 응우옌 반 후에가 이끄는 군대의 속도가 너무 빨라 말과 코끼리가 따라오지 못해 길가에서 죽었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실제로 그의 군대는 약 600여 km를 불과 10여 일만에 이동하였다. 이러한 이동 속도는 청군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사실 이전에 청군이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한 것 역시 청군을 자만하게 만들기 위한 응우옌 반 후에의 계략이었다.
정월 이후 전투가 시작될 것이라는 청군의 예측과 달리 응우옌 반 후에와 그가 이끄는 군대는 12월 말 공격을 개시했고, 1월 3일(양력 1789년 1월 28일) 밤에는 탕롱까지 공격했다. 당시 안남 측 기록에 따르면 청의 군대는 겁에 질려 항복했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응옥호이 요새 역시 응우예 반 후에가 이끄는 코끼리 부대의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많은 청군 지휘관 역시 전투 과정에서 전사했고, 결국 청군의 사령관인 손사의는 홀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후 응우옌 반 후에의 태도였다. 그는 청과 강화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태도를 낮추어 건륭제에게 깊이 사죄하는 글을 보냈다. 심지어 건륭제의 팔순 잔치 때는 직접 입조하여 조공까지 바치겠다는 뜻까지 전했다. 건륭제는 크게 기뻐하면서 그의 사죄를 받아들였고, 그를 안남 국왕에 책봉한다는 칙서를 내렸다. 이후 이 전쟁은 건륭제의 10대 치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전쟁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첫 번째는 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가 흔들리는 배경이 되었다는 점이다. 안남을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지방에서는 청의 지배력이 현격히 약화되었다. 이것은 이후 백련교도의 난과 회교도의 반란 그리고 태평천국의 난 등 중국 남부 지역에 대한 통제력 약화로 이어졌고, 결국 청조가 급격히 쇠퇴하는 계기가 되었다.
두 번째는 베트남과 중국이 서로 다른 나라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이를 위해 저항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분명히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응우옌 반 후에는 청의 공격에 대항하며 선포했다.
“중국인은 우리와 다른 인종으로 그들의 생각은 우리와 같지 않다. 한(漢) 이래 저들은 수도 없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육하였는가? 우리는 누구도 이런 수모를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한대에는 쯩씨 자매가 있었고, 송대에는 딘 띠엔 호앙과 레 다이 하인이 있었다. 원대에는 쩐 흥 다오가, 명대에는 현 왕조의 개창자자인 레 타이 또가 있지 않았는가 ... (중략) 이제 또 청이 쳐들어와 우리를 속국으로 만들려고 한다. 어째서 저들은 송·원·명대에 일어난 일들을 모른단 말인가? 장졸들은 분별과 능력이 있으므로 나를 도와 이 중대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왠지 응우옌 반 후에의 연설에서 주어를 바꿔 “우리에게도 일본에게 강점당한 30여 년간 저항한 독립투사가 있었습니다”라고 표현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