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고 버티던 여중사의 '극단선택'…해군은 '책임 회피'
입력 2021.08.14 05:18
수정 2021.08.14 01:19
도서지역 부임 3일만에 성추행 당해
"피해자, 피해사실 처음 알릴 당시
'신고는 아니다'는 식으로 얘기"
'피해자 의사 존중' 뒤로 숨는 해군
성추행 피해를 입은 뒤 숨진 채 발견된 해군 여중사 사건과 관련해 서욱 국방부 장관이 보고를 받기까지 76일이 걸린 것으로 확인됐다.
해군은 피해사실이 알려지길 원치 않던 피해자 의사를 존중한 결과라고 해명했지만, 이를 명분 삼아 사건을 축소하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13일 해군 측이 공개한 사건 경위에 따르면, 피해자인 A 중사는 지난 5월 24일 섬에 위치한 해군 기지에 부임했다. A 중사는 이전에도 해당 섬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고 한다.
A 중사는 부임 3일 뒤 상관이자 가해자인 B 상사와 부대 인근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함께한 것으로 확인됐다. B 상사는 식당에서 손금을 봐준다며 A 중사 손을 1~2분간 만지는 등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시도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A 중사는 피해 당일,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C 주임상사를 찾아 성추행 피해사실을 알렸다. 해군 관계자는 A 중사가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신고가 아닌 식으로 이야기했다"며 "피해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으면 한다는 의사표명을 확실히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C 주임상사는 A 중사로부터 피해사실을 전해들은 후, B 상사를 따로 불러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다. 해군 관계자는 "이후 (A 중사에 대한) 어떤 성폭력 언행은 없었다"며 2차 가해가 없었다는 점을 에둘러 강조했다.
해당 관계자는 C 주임상사가 성추행 사건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선 법령과 훈령이 '충돌'하는 문제가 있다고 해명했다. 성추행 사실을 즉각 보고토록 규정한 '법령'과 피해자 의사에 반할 경우 보고를 삼갈 수 있다고 명시한 부대관리 '훈령'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해군 측은 A 중사가 근무지 이동 시 3개월 내 상담을 받아야 하는 규정에 따라 지난 6월 30일 유선 상담을 받았지만, 당시에도 피해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A 중사는 상담 과정에서 △10년 이상 복무한 고참이라는 점 △해당 섬 근무가 2번째라는 점 등을 언급하며 "상사 진급도 할 생각이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했다.
사건인지 후, 피해자·가해자 분리 안해
2달간 어떤 일 있었는지 조사해야
해군 측 설명을 요약하면 △피해자가 성추행 피해를 입은 직후 상관을 만나 피해사실을 알렸지만, '정식 보고'는 아니었다 △피해자가 피해사실에 대한 상부 보고를 꺼렸다 △피해자로부터 피해사실을 전해 들은 상관은 훈령과 법령이 상충되는 만큼, 보고 의무를 저버린 것이 아니다 △피해자는 2차 가해 등 추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등으로, '군은 피해자 의사를 존중했으며 대응 과정에서 큰 문제는 없었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피해자 의사 존중'을 내세워 사실상 책임을 회피하고 나선 셈이지만, 사건 인지 직후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지 않는 등 '대응 미비'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는 평가다.
특히 A 중사가 피해를 입은 지 두 달여가 흐른 이달 7일, 부대 지휘관에게 피해사실을 뒤늦게나마 알린 만큼, 해당 기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해군 관계자는 "조사가 진행 중"이라며 "결과가 나오면 추가로 설명드리겠다"고 말했다.
가해자, '2차 가해' 정황
성추행 다음날 술 따르도록 해
실제로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이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가해자가 피해자를 왕따시키며 괴롭혔다고 한다"는 유가족 증언을 소개했다. 2차 가해가 없었다는 해군 측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 의원은 유가족 증언을 바탕으로 B 상사가 성추행 다음날 식사 자리에 A 중사를 불러 술을 따르게 했으며, A 중사가 이를 거부하자 "3년 동안 재수가 없을 것"이라고 악담을 퍼부었다고도 했다.
아울러 그는 유가족 측으로부터 제공받은 문자 메시지도 공개했다. A 중사는 지난 3일자 메시지에서 "지난번에 미친놈 있었잖아요 근데…일해야 하는데 자꾸 배제하고 그래서, 우선 오늘 그냥 부대에 신고하려고 전화했어요. 제가 스트레스를 받아선 안 될 것 같아요"고 밝혔다. 가해자인 B 상사가 2차 가해를 가한 것은 물론, 업무 불이익까지 줬다는 의혹이 일 수 있는 대목으로 평가된다.
피해사실 보고 이후 4일간 8차례 상담
'심적 부담' 겪었을 피해자 지원
적절했는지도 살펴봐야
그 밖에도 A 중사가 피해사실을 정식 보고한 9일부터 숨진 12일까지 군 대응이 적절했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A 중사가 해당 기간 무려 8차례에 걸쳐 성고충 상담관과 통화를 가졌던 만큼, 심적 부담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해군 관계자는 A 중사가 상담 과정에서 극단적 선택을 암시하거나 어려움을 호소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추가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라면서도 "성고충 상담관이 전화 상담을 진행했고, (피해사실 정식 보고 이후) 함대는 지휘보고 및 (피해자 가해자) 분리조치를 시행했으며, 여군을 붙여 밀착 지원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