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휴가? 회사에선 논의조차 없어요"…사각지대 놓인 근로자들
입력 2021.06.04 09:04
수정 2021.06.04 11:06
백신휴가, 대기업 위주로 도입 확산…중소·중견기업 근로자는 '소외'
백신 접종 후 이상 반응 발생 시 '개인 연차' 소진해야
정부, 민간 사업장 백신 휴가 '의무' 아닌 '권고'…실효성 논란↑
“백신 휴가제요? 회사에선 아예 논의조차 하고 있지 않아요”
“백신 맞은 다음 날 현장으로 출근합니다. 부작용 있으면 개인 연차 사용하래요”
고령층에 이어 젊은층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접종이 본격화될 예정이다. 이에 백신 접종 후 최대 이틀의 유급휴가를 제공하는 백신 휴가제가 대기업 위주로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중소기업과 특정 업계 근로자들은 백신 휴가제는 ‘그림의 떡’이라며 현실적으로 도입 불가능한 사안이라고 토로했다.
이들은 회사 내부에서 백신 휴가제 도입 논의는 아예 없었다며 백신 접종 후 이상 반응이 생기면 개별 연차를 사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백신 휴가제가 도입되더라도 자유로운 휴가 사용은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백신 휴가 논의 언급조차 없다"…백신 접종 후 바로 현장 복귀
휴가 쓰면 팀원에게 업무 가중 우려↑…유사시 개인 연차 사용 권장
20인 규모의 의료기기 판매업체에 재직 중인 윤종인(가명·31)씨는 “회사에서 백신 휴가 도입에 대해 언급된 게 전혀 없다. 아직 관련된 논의가 시작되지도 않았다”며 “규모가 20인 정도로 작은 회사여서 백신 휴가로 인해 결원이 발생하면 회사 운영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어 휴가 사용을 꺼린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설계사무소에 재직 중인 박정철(가명·34)씨 역시 “백신을 맞은 다음 날 바로 회사로 복귀해야 한다. 외근을 많이 나가는 업무 특성상 현장에서 작업하는 날이 많다. 백신을 맞은 다음 날 현장으로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회사에서 백신 접종 후 이상 반응이 생기더라도 따로 휴가를 주지 않는다. 백신을 맞고 쉬고 싶으면 개인 연차를 소진해야 한다”며 “팀원들과 함께 업무를 진행하기 때문에 휴가를 이틀 이상 사용하는 게 쉽지 않다. 휴가를 쓰면 다른 팀원들에게 업무를 분담해야 해서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구조”라고 덧붙였다.
언론사 기자로 재직하는 박승진(가명·34)씨는 다음 주 얀센 백신 접종을 앞두고 있다. 그는 통화에서 “국내에서 접종이 이뤄진 적 없는 얀센 백신을 맞는 게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직 중인 회사에 백신 휴가제가 도입되지 않아 백신 접종 후 정상 출근을 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박씨는 “아직까지 회사에 백신 휴가가 도입되지 않았다. 노조에서 논의를 하겠다고 했지만 가이드라인은 나오지 않았다. 회사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것 같진 않다”며 “백신 접종 후 이상 반응 발생 시 연차휴가 소진으로 가닥이 잡혔다. 얀센 백신은 국내에서 다음 주부터 첫 접종이 시작되는 생소한 백신인데 부작용이 생길까 걱정된다. 어떤 이상 반응이 나올지 모르니 불안하다”고 덧붙였다.
경찰, AZ백신 '반강제 접종' 논란에도 "백신 휴가? 따로 없어"
앞서 ‘AZ 백신 반강제 접종’으로 논란이 되었던 경찰도 조직 내 백신 휴가는 도입되지 않았다. 지난 28일 경찰은 내부 공문를 통해 백신 접종 후 이상 반응이 있는 경우에만 접종 다음 날 병가를 하루만 낼 수 있다고 공고했다.
서울에서 경찰로 근무하는 이준영(가명·30)씨는 “따로 백신휴가가 도입되진 않았다. 백신 접종 후 이상 반응이 있는 경우만 병가를 낼 수 있다. 병가는 연차에서 소진되진 않지만 백신 접종을 받은 모든 경찰에게 유급 휴가를 주진 않는다”며 “이상 반응이 있는 경우 접종 다음 날 하루만 병가를 사용할 수 있다. 눈치가 보여서 이틀씩 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은 이상 반응이 있더라도 병가를 하루만 쓴다”고 설명했다.
백신 휴가가 도입된 기업이더라도 휴가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방송국에 재직 중인 입사 1년 차 서지수(가명·24)씨는 연차가 어릴수록 휴가를 쓰기 어려운 구조라고 설명했다. 새벽 시간대에 근무하는 저연차 사원이 휴가를 쓸 경우 선임에게 새벽 근무를 요청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씨는 “회사 내부적으로 백신 휴가 공지가 뜨긴 했지만, 방송국 특성상 새벽 근무자들이 휴가를 사용할 경우 팀원들이 새벽 근무를 대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며 “이로 인해 백신 휴가를 자유롭게 쓰는 게 눈치 보일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휴가로 인한 근무자의 결원은 다른 팀원에게 업무 가중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휴가 사용이 부담된다. 이틀을 편하게 쉬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새벽부터 밤까지 팀원들마다 근무 시간대가 다른데 공백이 생기면 대체 인력을 선별하는 게 어렵다”고 토로했다.
정부는 민간 사업장 내 백신 접종자들에게 접종 당일과 접종 다음 날 휴가 사용을 권고하고 있지만 의무 지침은 아니다. 그러나 다음 주부터 30대 남성층을 중심으로 얀센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서 백신 부작용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아직 국내에서 접종이 시작되지 않은 얀센 백신 부작용과 관련해 백신 휴가 기간 동안 면밀한 관찰이 필요하다며 백신 휴가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천은미 이대목동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다음 주부터 국내에서 첫 접종이 이뤄지는 얀센 백신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처럼 아데노바이러스 기반의 백신이라 부작용이 심할 수 있다”며 “국내에서는 아직 얀센 백신 접종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부작용에 대한 보도가 나오지 않은 상황이라 어떤 이상 반응이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천 교수는 “화이자 백신은 2차 접종 후 발열 반응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앞으로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백신으로 접종이 이뤄지기 때문에 근로자들은 하루에서 이틀 정도 백신 이상 반응과 관련해 몸 상태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그는 “대기업에서는 백신 휴가를 속속 도입하고 있는데 중소기업·프리랜서·자영업자들은 소외되는 경우가 많다. 백신을 맞고 36시간 안에 이상 반응이 생기면 증상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정부가 일정 부분 중소기업에 지원하는 방식을 취해서라도 대기업처럼 전 임직원이 최소 하루는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