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캐릭터탐구⑨] 고독한 ‘체스 플레이어’ 김서형(마인)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입력 2021.05.19 10:45
수정 2021.05.19 10:51

tvN 토·일 드라마 ‘마인’(연출 이나정, 극본 백미경)이 화제다. 백미경 작가의 전작 ‘품위있는 그녀’와 도입부와 인물 설정이 비슷하다는 의견에도 시청자 사이에서는 최고의 이슈 작이다. 박원숙, 예수정, 이보영 등 믿고 보는 배우들이 출연했다. SBS 드라마 ‘아내의 유혹’ 신애리에서 JTBC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인기 캐릭터 ‘쓰앵님’ 김주영에 이르기까지, 맡았다 하면 ‘감상의 재미’를 구축해 내는 배우 김서형의 인기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드라마 ‘마인’ 봤어?”

“어떤 거지?”

“김서형 나오는 드라마”

“아, 그거!” 혹은 “아! 봐야겠네!”


드라마 정주행을 시작하고 나면 박혁권처럼 낯익은 연기파 배우부터 새로운 얼굴이지만 연기력만큼은 쟁쟁한 배우들에게 만족감을 느끼겠지만, 우선 드라마를 보게 하는 ‘흡인력’을 김서형이 발휘하고 있다. 출연작마다 높은 시청률을 견인하는 이보영의 역할도 물론 크다.


김서형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 4회분이 방영된 드라마를 보면서, 아니 첫 회부터 정서현 역에 ‘대안의 배우’가 있을까를 자꾸만 생각했다. 연기력이 아쉬워서가 아니다. 인상적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건 배우에게 연기대상을 가져와 줄 수도 있지만, 그 여운이 너무 길고 강해 차기작들에서 “지난번이랑 비슷하네”라는 혹평을 부르기 십상이다. 어쩜 그런데, 김주영은 생각나지 않고 정서현만 보인다. 마치 원래 알던 사람 같고, 오래 봐온 인물 같다. 그만큼 배우가 캐릭터에 깊숙이 들어가 있다는 방증이다.


내가 ‘마인’의 작가였다면, 김서형을 출연시키고 아니고를 떠나 일단 정서현 캐릭터를 시뮬레이션해내는 데 있어 김서형이라는 배우를 염두에 두었을 것 같다. 내가 연출가였다면, 극본을 읽고 정서현 역에 김서형 외에 떠오르는 배우가 없었을 듯하다. 그래서 작가와 연출가를 못 하는 거야, 라고 지적한다면 받아들이겠다(^^). 공감해 줄 시청자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김)서형과 이름도 비슷한 (정)서현은 어떤 인물인가. ‘효원’이라는 대한민국 내 ‘그들만의 왕국’의 제왕이다. 비록 좀 어리보기라지만 남편이자 효원그룹의 장남 한진호(박혁권 분)가 버젓이 있고, 기세와 고집이 등등한 시어머니 양순혜(박원숙 분)가 버티고 있고, 서자라지만 그룹의 경영을 담당하는 실세 차남 한지용(이현욱 분)이 있지만, 꼭짓점에는 정서현이 있다.


마치 중세 유럽의 성을 연상시키는 효원 가의저택은 드넓은 숲 안에 위치한다. 시어머니와 한진호 부부가 기거하는 큰집 ‘카덴차’, 한지용 부부가 거주하는 작은집 ‘루바토’로 나뉘어 있다. 둘 다 이탈리아어이고, 음악용어다. 루바토(rubato)는 박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하는 연주법이나 창법, 카덴차(cadenza)는 악곡을 끝내게 하는 화음들의 결합 또는 악곡이 끝나기 직전에 독주자나 독창자가 연주하는 ‘기교적이며 화려한’ 부분을 가리킨다.


루바토에서는 드레스코드 블랙을 깨고 혼자 붉은 드레스를 입을 줄 아는 둘째 며느리 서희수(이보영 분)의 자유로움과 당당함이 드러나고, 카덴차에서는 장차 모든 혼란의 소용돌이를 끝낼 정서현의 역할을 기대케 한다. 따라서 카덴차는 정서현의 집, 루바토는 서희수의 집이라고 설명을 바꾸는 게 맞다.


어느 왕국이나 왕은 둘일 수 없다. 왕은 정서현이다. 단순히 큰집이어서가 아니다. 애초 재벌가 자데로 뼛속까지 귀족이어서도 아니다. 정서현은 카덴차, 루바토 구분할 것 없이 ‘효원왕국’ 전체를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다. 대소사에 정서현의 인가와 재가가 필요하고, 집안 곳곳 인물들의 정보를 파악하고 있고 통제한다. 서희수가 내 가족, 나의 자유를 추구하는 동안 정서현은 통치를 즐긴다.


음색 끝내주는 엠마 수녀(예수정 분)의 내레이션 그대로, 정서현은 효원이라는 체스판 위의 말들을 움직이는 ‘체스 플레이어’이다. 아직 그 앞에 앉은 플레이어는 누구인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는데, 정서현은 천하무적으로 보인다. 정서현은 생각하고, 결정하고, 명령하고, 실행결과를 ‘체크’한다.


사실 4회까지만 놓고 보면, 정서현은 움직이는 ‘말’이 아니라 체스를 두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소 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서희수에 비교해 움직임이 적고 감정이 차갑다. 정중동의 캐릭터로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기란 쉽지 않다. 김서형은 해내고 있다. 정서현의 머릿속 움직임을 우리가 마치 ‘행동’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김서형이 표현해내는 정서현, 정서현을 안방극장 안에 탄생시킨 김서형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다. 김서형은 자신이 마음속에 품은 바를 적은 표현으로도 보는 이에게 전달해 낼 줄 아는 배우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갈 거냐고? 그러면 조금 지루할 수도 있겠다고? 걱정은 금물이다. 정서현은 자신의 제왕 지위를 위협할 수 있는 ‘비밀’을 숨기고 있다. 그저 통치를 즐기는, 밋밋한 왕이 아니다. 그가 딛고 선 땅은 단단하지 못하고, 비밀에 의해 언제든 바닥이 꺼질 수 있다. 그 불안과 초조가 이미 정서현에 살며시 배어 있다. 현재까지는 서희수에게 닥친 위협이 먼저 그려지고 있지만, 정서현이 치러야 할 전쟁의 서막이 곧 오를 것이다.


위기는 ‘비밀’에게서만 오지 않을 것이다. 한진호의 아들 수혁(차학연 분)의 엄마로서 김유연(정이서 분)이라는 변수를 맞닥뜨릴 것이고, 효원왕국의 왕으로서 강자경(옥자연 분)이라는 폭탄을 해체해야 할 것이다. 차가움이 줄고 뜨거움이 커질, 마그마를 표출해도 뻔하게 내뿜지 않을 김서형의 연기가 벌써 궁금하다. 악장을 끝내고, 교향곡을 마무리할 김서형의 ‘카덴차’를 기다린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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