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명대사⑤] 화양연화-2046, 왕가위 감독이 비밀을 묻는 방법
입력 2021.04.14 00:00
수정 2021.04.13 22:30
최근, 영상예술의 대가 왕가위 감독의 감독들이 리마스터링되어 깨끗한 화질로 만날 수 있게 됐다. 그 가운데 ‘화양연화’(2000)와 ‘2046’(2004)은 4년 차이를 두고 제작됐지만, 실상 하나로 이어지는 차우(양조위 분)의 이야기로 봐도 무방하다.
왕가위가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감독도 아니고, 화면은 빠르게 흐르다가도 멈춘 듯이 서 있고 음악은 심장을 쿵쿵 울리다가도 정적으로 잦아드는 변화무쌍한 연출을 구사하는 데다 현실과 비현실이 예고 없이 뒤섞이고 교차하다 보니 ‘줄거리’를 세우는 일도 만만하지는 않다. 사실, 시간 순서에 맞춰 줄거리를 재배열하지 않아도 왕가위의 영화는 그 자체로 아름다워서 눈도 귀도 호강한다. 그대로 즐겨도 된다. 아니, 생긴 그대로 존재하는 그대로 모든 감각과 마음과 감성을 열고 받아들이면 이보다 황홀할 수 없다.
그런 줄 알지만, 기자의 일이라는 게 여기서 기사를 멈출 수도 없어서. 굳이 차우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1962년 홍콩에서 ‘화양연화’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이 없이 아내와 둘뿐인 차우는 구 씨 아저씨네 방 한 칸에 세 들어 이사하고, 같은 날 수리첸(장만옥 분) 역시 출장 간 남편 없이 홀로 쑨 부인 집으로 이사한다.
두 사람은 다세대 주택 같은 아파트를 오르는 좁은 계단과 복도에서 자주 마주치는데 차우는 수리첸의 가방이 자신의 부인 것과 같다는 것을, 수리첸 역시 차우의 넥타이가 자신의 남편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보며 둘의 배우자들이 외도하고 있음을 알아챈다. 차우의 부인, 수리첸의 남편은 옆집에 살면서 차우네 방에서 밀회를 즐긴다. 두 사람의 얼굴은 화면에 잡히지 않고 목소리와 뒷모습으로만 나오는 게 이채롭다.
이미 소원한 부부관계였는지 배우자의 외도 자체에 충격을 받기보다는 두 사람이 어떻게 시작된 건지 궁금해한다. 한 번은 차우가 수리첸의 남편이 되어, 또 한 번은 수리첸이 차우의 부인이 되어 상황을 재연하듯 연습해 보는 두 사람. 두 사람이 거듭 만나 공통된 화제를 이어나가는 바탕에는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라는 자존심과 선을 넘지 않을 자신감이 있다.
무협 소설을 좋아하는 두 사람은 함께 글을 쓰고, 성과를 얻자 차우는 한 호텔의 ‘2046’호에 아지트를 마련한다. 소설 쓰기를 권유했던 수리첸이건만 호텔 룸 앞에서 갈팡질팡 망설이다 아지트에 들어서고, 두 사람은 협업에 몰두한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 차우와 수리첸은 자연히 알게 된다,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차우가 고백한다.
“많은 일이 나도 모르게 시작되죠.”
우리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외로운 두 영혼, 배신당한 두 영혼은 서로에게 이미 빠져들어 있다. 온 힘을 다해 선을 지키려 애쓰는 두 사람. 그래도 하루는 수리첸이 차우의 어깨에 기댄다.
“오늘은 집에 가지 말아요.”
여느 때처럼 일본 출장을 간 수리첸의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말없이 일본으로 간 차우의 부인은 돌아오지 않겠다는 편지를 보내고. 중국 문화혁명의 시기, 신문기자 차우는 혼란스러운 홍콩을 정리하고 싱가포르로 떠날 결심을 하고 수리첸에게 말한다.
“내게 티켓이 한 장 더 있다면 나와 함께 가겠소?”
혼자 싱가포르로 떠나게 된 차우는 친구 아핑에게 얘기한다.
“옛날엔,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으면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산에 가서 나무를 하나 찾아, 거기 구멍을 파고는 자기 비밀을 속삭이곤 진흙으로 봉했대요.”
차우는 싱가포르로 가기 전 캄보디아에 들른다. 앙코르와트, 옛 도시의 성곽 벽에 난 구멍에 자신의 비밀을 오래도록 소곤소곤 말하곤 자리를 뜬다. 그 작은 구멍 속에서 흙과 차우의 비밀을 먹고 자랄 작은 나무가 보인다. 차우와 수리첸의 조용한 사랑이 조용하게 끝을 맺는다.
차우의 싱가포르 이야기는 영화 ‘2046’으로 이어진다. 사랑의 비밀을 봉인하고 이국에 왔지만, 구멍 뚫린 가슴은 메워지지 않고 도박으로 전 재산을 날린다. 이때 차우를 돕겠다고 나선 이가 있으니 언제나 왼손에 검은 장갑을 끼는 ‘거미여사’(공리 분)이다. 그는 차우에게 잃은 돈을 회복하게 도와주겠으니 본전만 찾으면 도박판을 떠나라고 권유한다, 조건은 아무것도 묻지 말 것!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거미여사의 본명은 수리첸이고, 차우가 비밀을 묻고 온 캄보디아에서 온 여인이다. 인생의 바닥을 헤매고 있을 때 손을 내밀어 준 수리첸에게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느끼는 차우.
“나와 함께 떠날래요?”(차우)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했죠!”(수리첸)
아! 함께 떠나겠냐는 질문도 무언가를 물은 것이구나! 차우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진한 키스를 남기고 떠난다.
“과거에서 벗어나면 내게로 와요.”
홀로 남은 수리첸은 붉게 번진 입술, 눈물을 가득 머금은 눈으로 거리를 걷는다. 처연하다. 차우의 말은 수리첸에게 한 말이었을까, 자신에게 한 말이었을까. 또 한 명의 수리첸에게 빠져 과거에서 허우적대는 건 차우다.
차우는 홍콩으로 돌아온다. 싱가포르에서 봤던 나이트클럽 댄서 루루(홍콩에서는 미미, 유가령 분)를 조우하고, 만취하자 묵고 있는 호텔로 데려다주는데 ‘2046’호이다. 방 열쇠를 가져왔음을 알고 다음 날 아침 가져다주는 차우. 또 다른 속셈도 있다. 수리첸(장만옥 분)과 글을 썼던 2046호와 같은 호실에 묵고 싶은 끌림. 하지만 주인은 2047호에 묵을 것을 권한다.
투숙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2046호에서 루루는 생을 마감했다. 루루는 ‘발 없는 새’만 사랑했고, 이를 나이트클럽 드러머인 애인이 질투했다. ‘발 없는 새’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 ‘아비정전’(1990)의 아비(장국영 분)이고, ‘아비정전’에서 루루는 아비를 찾아 필리핀까지 찾아갈 만큼 아비밖에 몰랐다. 영화 ‘아비정전’의 루루 이야기가 영화 ‘2046’의 2045호에서 마무리된 것이다.
호텔 주인은 2046호로 옮기라고 하지만 차우는 2047호가 익숙해졌다. 그리고 2046호에는 아름답고 활기찬 바이링(장쯔이 분)이 투숙한다. ‘화양연화’에서 수리첸을 잃은 후 더이상 사랑을 믿지 않고 부나비처럼 하룻밤 정사를 즐기는 차우, 옆방의 소리가 괴로운 바이링. 바이링은 친절하면서 차가운 차우에게 끌리고, 차우는 수리첸(장만옥 분)처럼 치파오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바이링에게 눈길을 빼앗긴다.
N극과 S극의 끌림처럼 시작된 하룻밤. 차우는 바이링을 여러 상대 중의 한 명으로 대하고, 바이링은 알고 시작해 놓고도 차우를 독점하고파 한다. 약속을 어긴 게 바이링 같지만, 바이링은 사랑의 속성 그대로 독점욕이 발동한 것이고 자신의 평소 지론대로 일회성 욕망이 아닌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 택시 안에서 어깨를 기대오는 바이링을 밀어낸다, ‘화양연화’의 수리첸이 자신에게 그리했던 것처럼. 평행선은 만날 수 없다. 바이링을 바라본 게 아니라 또 하나의 수리첸을 바이링에서 발견한, 시작부터 잘못된 관계였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차우를 견디지 못해 떠나는 바이링. 2046호엔 다시 호텔 주인의 딸 왕징웬(왕페이 분)이 기거한다. ‘중경삼림’ 때보다 더욱 맑게 아름다워진 왕페이가 빛을 발하는데, 자꾸만 일본어를 중얼거린다. 일본으로 출장가던 수리첸(장만옥 분)의 남편을 기억나게 한다. 그 연상은 당연히 수리첸으로 이어졌으리라. 일본인 애인(기무라 타쿠야 분)과의 교제를 반대하는 아버지, 일본으로 가는 애인을 따라나서지 못한 왕징웬. 차우는 애처로운 두 연인의 오작교 역할을 자청한다. 애인은 차우에게 편지를 보내고, 차우는 왕징웬에게 전해 준다.
객지에서 먹고 사느라 왜색소설을 쓰는 차우에게 왕징웬이 자신의 습작원고를 보여준다. 의기투합해서 미래소설 ‘2047’을 쓰는 두 사람. 소설 속에서나마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려던 것인데 너무 몰입해 쓴 탓인지, 수리첸과 하던 협업을 다시 하게 돼서인지 차우는 왕징웬에게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결코 표 내지 않는다. 되레 왕징웬을 더욱 응원, 일본으로 가게 한다. 소설 ‘2047’의 완성고도 일본으로 보낸다. 바람둥이 차우가 사라지고 ‘화양연화’의 지고지순 차우가 되살아온 느낌이다.
차우는 호텔 주인으로부터 왕징웬의 결혼 소식을 듣고서야 뒤늦게 사랑을 스스로 인정한다. 사랑은 타이밍인데, 차우의 사랑은 자꾸만 어긋난다. 왕징웬과 애인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는 소설의 결말이 슬프니 고쳐 줄 수 없냐는 바람이 아버지를 통해 전해지지만 차우는 고치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나마 두 사람의 사랑을 훼방 놓고 싶은 질투다. 안쓰럽기는 하나 연민할 것도 없다. 왕징웬에게서도 또 하나의 수리첸을 보고 느꼈던 차우 아닌가.
차우의 부초 같은 사랑, 정착을 모르는 이 남자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올 짝은 정말 없는 것일까. 차우를 잊지 못하는 바이링은 옛 연인을 찾아오지만, 차우는 여전히 싸늘하다. 아니, 힘주어 바이링을 손을 모질게 떼어낸다. ‘아비정전’의 아비가 수리첸(장만옥 분)과 루루의 사랑을 모질게 밀쳐냈듯이. ‘아비정전’의 마지막에 나온 양조위는 결국 아비처럼 ‘나쁜 남자’로 변한 차우였고, ‘2046’에서 그 구체적 실체를 확인시킨다. 사랑을 잃고 절망한 바이링은 홍콩을 떠나 싱가포르로 간다.
싱가포르의 수리첸에게 차우가 자신의 과거를 얘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게도 해피엔딩이 있을 뻔했죠.”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그때, 수리첸을 사랑했던 순수한 차우와 그런 차우를 사랑한 수리첸의 길지 않은 나날, 화양연화의 시절을 회상한 것이다.
‘아비정전’에서 시작해 ‘화양연화’로 이어진 수리첸의 이야기, ‘화양연화’에서 시작해 ‘2046’으로 마무리되는 차우의 이야기, ‘아비정전’에서 시작해 ‘2046’에서 끝을 맺은 루루의 이야기, 그리고 ‘아비정전’으로 남은 아비의 이야기. 왕가위의 세 작품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지며 순환하는 세계. 이 황홀경을 깨는 엉뚱한 이야기를 하며 기사를 맺고 싶다.
영화 ‘화양연화’에서 차우는 1966년 구 씨 아저씨 댁을 찾는다. 새 주인은 구 씨 아저씨는 필리핀(아비가 생을 마감한 곳)으로 이사 간 지 오래고, 옆집 소식을 물으니 쑨 부인도 얼마 전 이사를 갔다고 전한다. 차우가 옆집에는 누가 살고 있느냐 물으니 엄마와 아들이 사는데 아들이 아주 귀엽더라고 말한다, 차우가 빙긋 웃는다. 구 씨 아저씨 댁을 나와 출구로 향하던 차우는 뚫어지게 옆집 대문을 바라본다. 수리첸은 아들 융성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서려 한다.
차우가 구 씨 아저씨 댁을 간 이유, 옆집 소식을 물은 이유는 자명하다. 수리첸이다. 찾아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안타까워 가슴이 미어진다. 수리첸이 이사 와 살고 있다면 당연히 쑨 부인 집일 텐데, 이사 온 이유가 단지 옛 추억을 더듬기 위해서가 아니라 차우가 찾아온다면 여기밖에 없기 때문이었을 텐데. 이사까지 와 있는 여자가 있는데 남자는 왜 바라보기만 하는가. 초인종을 눌렀다면, 차우 인생에 한 번 있을 뻔한 해피엔딩은 그의 것이 됐을 것이다. 생각지 못한 귀여운 아들도 만나고.
차우는 인생의 벨을 울리지 않았고 캄보디아에 가서 비밀을 묻었다. 벽의 구멍에 대고 오래도록 속삭였다. 영화 ‘2046’에서 ‘2046’이라는 장소는 모든 게 영원하다. 기억도 영원할 것이어서 사람들은 잃어버린 기억을 찾으러 그곳에 간다. 숱한 이가 비밀을 말했을 나무 구멍이 있다. 두 곳 다 진흙으로 봉하지 않아서 우리는 그 비밀을 알게 되었다. 감독 왕가위의 색채와 소리를 입은 ‘화양연화’와 ‘2046’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