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캐릭터탐구⑤] 비밀을 가진 남자, 김래원…지오 그리고 '루카'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입력 2021.03.24 06:49
수정 2021.03.24 06:50

영화 ‘마이 리틀 히어로’ 때로 기억한다. 벌써 9년 전이다. 김래원에게 물었다. 세상에 많은 배우가 있는데 김래원이라는 배우가 필요한 이유, 김래원이라는 배우의 좌표를 물었다.


김래원은, 그 답은 기자님들이 내주셔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스스로 어떤 배우라고 생각한다’보다 ‘대중이 어떤 배우로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는 답이었다. 그때 이렇게 답했다.


“남모르는 비밀을 가진 사람, 겉으로 보기엔 깡패지만 속으로는 남모를 순정을 감추거나 누르고 있는 사람을 연기하기에 적합합니다. 설사 비밀과 순정을 꽁꽁 숨겼다 해도 나중에 반전이 드러났을 때 고개가 끄덕여지는 배우, 극과 극의 양면을 동시에 품고 있고 표현할 수 있는 배우가 김래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답은 지금도 유효하다. 김래원이 발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지닌 배우로서의 강점을 계속해서 잘 가꾸고 심화시켜 왔기 때문이다. 지난 3월 9일 종영한 tvN 드라마 ‘루카: 더 비기닝’에서도 확인된다.


지오는 허우대 멀쩡한 청년이다. 말수가 적고 궂은일을 묵묵히 한다. 뻣뻣하지만 순하고, 표정 없지만 예의 바르다. 욕망도 열정도 없는 사람처럼 하루하루 육체노동으로 살고 있지만, 사실은 지오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능력이 있다. 주변에 위험한 존재가 나타나면 털이 서고 각성하면 눈동자가 파래지면서 온몸에서 엄청난 전기를 일으킨다. 전기를 쓰고 나면 이전까지의 기억은 모두 잊고, 마치 막 지구별에 도착한 외계인처럼 깨어난다. 지오는 자신의 초능력을 감추고 조용히 살아간다. 누구보다 평범한 사람으로, 남과 다르다는 것을 들키지 않고 살고 싶다.


지오의 초능력은 이 세상의 가진 자들, ‘살아서 천국’을 살고 싶은 기득권자들이 떠받치는 사이비종교가 후원하는 연구소에서 ‘만들어졌다’. 인간 남녀의 정자와 난자에 전기뱀장어, 초파리 등 지구 생물 역사에서 강인하게 살아남은 종족의 유전자들을 결합한 수정란을 대리모에 착상시켜 출산한 생명체다. 진화를 멈춘 인류를 ‘진화’시켜, 신인류를 탄생시키겠다며 유전자 조작한 생명체다.


인간의 물리적 능력을 넘어서는 파괴력, 상처 회복력, 전기 발생과 위험 인지 능력, 뛰어난 청력까지 많은 것을 갖췄지만. 야생의 세계에서라면 어느 인간과 맞붙어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초능력을 지녔지만. 지오는 이 사회에서 지배자로 살지 못한다.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버려진다. 지오는 겁먹은 눈으로, 누군가의 보살핌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어깨를 움츠린 채 소외된 사회적 약자로 살아간다.


드라마 ‘루카: 더 비기닝’은 먼저, 우리에게 묻는다. 지오는 인간인가, 괴물인가.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숨죽여 살아가는 모습일 때, ‘튀지 않고’ 묻혀 살고 있었을 때 지오는 인간으로 보였다. 아니, 하늘에구름이(이다희 분)를 구하기 위해 절대 튀고 싶지 않아 하는 지오임에도 전기 나오는 손을 심장충격기 대신으로 사용했을 때도, 사람으로 보였다. 그것도, 웬만한 누구보다 마음 따뜻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내가 사람인가 괴물인가를 고민하는 존재론적 절망, ‘나는 사람이다’라는 확신까지는 없어도 ‘나는 괴물이 아니다’라는 자기 확신으로 다시 일어서는 모습에서는 ‘지오가 아니면 누가 사람인가’라는 결론이 섰다.


천성일 작가와 김홍선 연출 감독은 구름이의 입을 통해 말한다, 사람을 규정하는 마지막 조건은 ‘사랑’이다. 지오의 마음엔 비열함, 배신, 이기심이 없고 대신 ‘나 같은 존재는 나뿐’이라는 고독과 비밀을 숨기는 자의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리고 구름이를 만나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고, 나보다 지키고 싶은 존재를 향한 사랑을 알게 됐다. 짧은 시간이지만 김래원 특유의 눈은 사라지고 눈웃음만 남는, 환하게 이를 드러내는 기분 좋은 미소가 만면에 가득했다. 사랑이었다. ‘유전자조작 0번’이라는 의미의 ‘G-0’, 지오는 사랑 속에서 온전한 인간으로 완성됐다. 상대를 아끼고, 상대를 위해 나를 아끼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사랑의 열매로 아기를 잉태하고, 부모가 된 지오와 구름이. 처음엔 한마음 한뜻이었는데, 자신들의 생명보다 소중한 아기가 위험에 처하면서 둘의 선택은 다른 길을 간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로 내 아이를 괴물로 단정하고 실험대에 올릴 수 없는 엄마, 나와 똑같은 고통 속에서 살지 않도록 예방책을 마련하고 싶은 아빠. 예방책은 두 가지, 미리 전기에 단련시켜 전기를 쓰면 기억을 잃고 다시 홀로 되는 혼란을 경험하지 않게 하려는 것, 세상에 나 같은 존재가 나뿐이라는 고독을 느끼지 않도록 동족을 만들어 주는 것.


딸 아이를 실험대에 올린 순간 구름이는 지오에게 선언한다. “아빠 될 자격 없다, 인간이 될 자격도 없다!”. “많이 사랑했다”며 이별을 고하는 구름이를 향해 “구름아, 사랑해”라고 외치는 지오. 아비로서 잘못된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그때까지는 사람이었다, 분명. 하지만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아기와 구름이, ‘사랑’을 잃고 지오는 ‘괴물’이 되었다. 자신의 체세포를 복제해 제2, 제3, 제100의 지오를 만든다. 그 존재들은 과연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을지 모르는 딸을 위한 동족일까, 지오 자신을 위한 것일까. ‘다르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버려졌다며 세상에 악심을 품고 현세를 모조리 파괴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조커가 지오에게서 보인다.


숱한 ‘지오’들을 앞에 두고 지오가 말한다. 드라마 ‘루카: 더 비기닝’의 마지막 대사다. “오늘 홀로세가 끝났다!”. 신생대 4기, 약 1만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현세대’ 인류가 끝났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존재론적 특성을 가진 인류가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다 못해, 드라마 속 표현을 빌자면 네안데르탈인이 호모사피엔스 종으로 바뀌듯 지구 인류의 새로운 종족이 될 것이라는 단언이다. ‘지오’류의 생명체가 인류 표준이 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을 불허하고 싶다.


드라마 ‘루카: 더 비기닝’은 다시, 우리에게 묻는다. 지오 말고 우리는, 인간은 옳은 존재인가. 지오는 결론짓는다, 인간은 옳은 존재가 아니다! 왠지 모를 역심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친다. 영도 황정아(진경 분), 김철수 실장(박혁권 분), 류중권 박사(안내상 분)처럼 괴물이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끝까지 극도의 이기심을 보이는 인간도 있지만, 아이를 위해 떠났으면서도 지오를 향해 날아오는 총알을 자기 몸으로 막아서는 구름이도 있잖은가.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잘못된 선택으로 김 실장의 오른팔 노릇을 하지만 유나(정다은 분)라는 마음에 품은 한 사람을 지키는 게 존재 이유였던 이손 팀장(김성오 분), 나만 살고 보겠다는 덫에 걸려 못난 짓을 했었지만 끝내 인간성을 회복한 최진환 팀장(김상호 분), 야물지 못해 믿을 사람 못 믿을 사람 구분 못 하고 누구나 다 믿는 헐렁이지만 속정 깊은 황재열 형사(김유철 분), 투덜대고 팔아먹고 딱 평균치의 인간이지만 진짜 위기의 순간엔 힘이 돼 주고 의리 지키는 원이(안창환 분)의 모습에서 평범하지만 한 번쯤은 비범한 ‘우리’가 보이지 않는가.


제목 ‘루카: 더 비기닝’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고난을 극복한 영웅(히어로)의 해피엔딩이 아니라 오늘을 파괴하고 내일을 꿈꾸는 악인(빌런)의 출사표로 끝맺은 드라마의 제목에 ‘루카’가 붙었고 ‘더 비기닝’이 덧붙여졌다. 루카, 모든 생명의 공동조상. 더 비기닝, 그 시작. 만일 지오를 ‘루카’로 본다면, 그리고 지오의 빌런 발현과 체세포 복제로 인한 신인류의 탄생을 ‘더 비기닝’으로 본다면, 이 이야기를 하는 시점은 한참 후의 미래인 셈이다. 미래 시점에서 당대 인류의 가장 가까운 조상을 꼽았을 때, 그것이 지오가 되는 형국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지오를 루카로 꼽는 미래 인류가 지금의 우리 인간을 ‘옳은 존재’로 볼까는 차치하고, 과연 지오를 ‘악인’으로 볼 것인가.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아니 이제 막 이야기를 시작하는 모양새를 그려놓고 끝이 나버린 ‘루카: 더 비기닝’. 시청률, 시청평, 수익이라는 세 가지 요소 중 두 가지를 충족해야 시즌2가 가능하다는데. 시청률은 되돌이킬 수 없지만, 시청자 평가와 OTT·해외 판권 등을 통한 수익 창출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빌런이 된 배우 김래원이 보고 싶다. 그런 가운데도 비밀과 반전을 숨긴 김래원일 테니까.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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