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차 중고차 진입 금지 '역차별'…소비자는 '희생양'
입력 2020.12.28 11:02
수정 2020.12.28 11:16
수입 인증 중고차 대비 국산차 감가율 높아…신차 판매에 핸디캡
"중고차 업자 먹여 살리려고 소비자 피해 감수하란건가" 지적도
국내 완성차 업체의 중고차 시장 진출이 8년째 규제로 발이 묶인 상황이 수입차 업체들과 비교해 역차별이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중고차 거래 관련 소비자 피해가 잇따르는 상황에서 규제 기간 동안 자정 노력을 보이지 못한 중고차 시장을 이대로 방치할 경우 기존 중고차 업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소비자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28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진출한 수입차 브랜드 중 메르세데스-벤츠, BMW, 아우디, 폭스바겐, 볼보, 미니, 렉서스, 포드·링컨, 재규어·랜드로버, 포르쉐, 푸조, 람보르기니 등 상당수가 인증 중고차를 운영하고 있다.
고가 차종을 판매하는 브랜드들은 사실상 모두 인증 중고차 사업을 하고 있다. 람보르기니의 경우 그동안 인증 중고차 사업을 하지 않았으나 최근 국내 슈퍼카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며 판매가 늘자 지난달부터 사업을 시작했다.
수입차 업체들이 너나할 것 없이 인증 중고차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그 자체로 수익을 내기 보다는 ‘새 차를 더 잘 팔기’ 위함이다. 인증 중고차를 통해 자사 차량의 브랜드 가치를 지켜내는 한편, 소비자들에게는 잔존가치를 보장해줘 신차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다.
수입차 업계 한 관계자는 “요즘 소비자들은 차량 구매 후 몇 년 타다 팔고 다른 차로 갈아타며 다양한 차종을 경험하는 경향이 많은데, 그런 수요를 흡수하려면 인증 중고차 운영을 통해 투명하게 거래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게 필수적”이라며 “자사 브랜드의 차량이 품질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중고로 거래돼 사고나 고장 등으로 이미지가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인증 중고차 사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 인증 중고차가 운영되는 수입차와 그렇지 못한 국산차는 감가율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KAMA)에 따르면 현대차의 2017년식 제네시스 G80은 현재 신차 가격 대비 30.7% 낮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지만, 같은 연식의 벤츠E클래스는 25.5%, 벤츠GLC는 20.6%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또, 2017년식 현대차 쏘나타의 가격은 올해 45.7% 떨어졌지만, 같은 연식의 BMW3시리즈는 40.9% 낮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완성차 업체의 중고차 시장 진입 제한이 없는 미국에서는 한국 브랜드 차량의 중고가가 외국 브랜드와 큰 차이가 없다. 2020년 거래되고 있는 2017년식 아반떼의 평균 감가율과 동 기간 폭스바겐 제타의 평균 감가율은 모두 34.8%로 같았고, 2017년식 쏘나타의 평균 감가율은 43.3%로 같은 기간 폭스바겐 파사트의 평균 감가율(43.9%)과 비슷했다.
차량 잔존가치는 신차 구매 선호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고가의 내구재인 자동차를 구매하는 소비자로서는 되팔 때의 잔존가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차량 잔존가치를 보장할 경로가 막힌 한국 기업들은 해외에서도 당하지 않는 차별을 오히려 국내에서 당하는 셈이다.
인증 중고차는 통상 외부 중고차 시장에서 거래되는 중고차보다 비싸지만 소비자들은 인증 중고차를 더 선호한다. 해당 차량을 판매한 업체가 직접 차량 상태를 정밀 점검하고, 검사한 후 필요시 수리를 거쳐 일정 기간 차량의 품질을 보장하고 A/S도 해주니 신차 못지 않게 만족도가 높다. 결국 소비자들에게도 이익이다.
국내 신차와 중고차 거래규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산차에 중고차 인증제 도입을 막는 것은 소비자 권리를 박탈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소비자들은 기존 중고차 시장을 불신하고 있다.
지난달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시장조사 전문기관인 모노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000명에게 중고차 매매시장에 대한 소비자 인식 조사를 실시한 결과, 소비자들의 80.5%는 국내 중고차 시장이 불투명·혼탁·낙후돼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대기업보다 중소·영세기업에 관대한 소비자들이 이런 인식을 보이는 상황은 기존 중고차 사업자들이 자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는 지난 2013년부터 중고차 매매업을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해 보호 장치를 마련해줬으나 7년이 넘도록 자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전경련 조사에서 중고차 시장에 불신을 보인 소비자들은 그 이유로 가격산정 불신(31.3%), 허위·미끼 매물(31.1%), 주행거리 조작과 사고이력 등에 따른 피해(25.3%) 등을 지목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운영하는 ‘1372 소비자상담센터’에도 이같은 불만 상담이 빗발치고 있다.
소비자 보호 단체인 소비자주권시민회의는 지난 17일 성명을 내고 “중고차 시장은 급격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판매자와 소비자간 정보 비대칭으로 인해 질 낮은 물건이 많이 유통되는 ‘레몬마켓’의 대표적 사례로 꼽혀왔다. 소비자들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고 시장에 대한 불신은 매우 높다”면서 대기업의 완성차 업체의 중고차 시장 진입 허용을 촉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또 다시 중고차 매매업을 생계형 적합업종으로 묶어놓을 경우 소비자 보호를 등한시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 한 관계자는 “중고차를 구매하려다 사기를 당하거나 심지어 불량 업자들에게 협박을 당한 소비자들의 사례가 오랜 기간 쌓여 지금의 불신으로 이어졌다”면서 “중고차 업계의 반발을 의식해 계속해서 완성차 업체의 시장 진입을 막아놓는다면, 소비자들에게 계속해서 사기와 협박을 당해 가며 그들을 먹여 살리라는 것과 다름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