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배상' 압박하는 금감원…'투자자 책임' 원칙 뒤흔드나

이충재 기자 (cj5128@empal.com)
입력 2020.11.12 14:44
수정 2020.11.12 15:01

제재심 징계수위에 핵심 변수…금융권 "배상하라는 압박"

'엄벌방침' 내놨다가 일부 제재수위 낮추며 '우회 메시지'

금융감독원 제재심의위원회가 라임자산운용 사모펀드를 판매한 증권사와 최고경영자(CEO)에 대해 중징계를 내린 배경에 '소비자보호를 위한 사후 노력 부족'이 핵심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금융사들이 투자자에 대한 선(先)배상을 비롯한 사적화해에 나서면 징계수위를 감경해주겠다는 금감원의 우회적 메시지라는 분석이다.


12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감원 제재심이 사전 통보한 징계수위 대부분을 최종 결정까지 유지한 것은 감경 사유가 될 만큼 현격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전해졌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금융사의 피해자에 대한 구제노력이 제재 결정에 반영된 것으로 안다"며 "적극적으로 노력한 금융사와 아닌 금융사에 대한 제재수위가 같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윤석헌 금감원장도 그동안 "금융사들이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로 활용하길 바란다"며 선배상을 공개적으로 압박해왔고, 향후 금융회사 각종 평가 때 반영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금감원은 손실이 확정되지 않은 펀드에 추정 손해액을 기준으로 선배상하는 방안을 제도화하겠다는 계획까지 내놨다. 이에 금융당국이 사모펀드 사태 부실 관리‧감독 책임론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금융사에 책임을 추궁하는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감원이 지난 11일 당초 예정에 없던 '옵티머스 펀드 회계 실사 보고서'를 전격적으로 공개한 것도 금융사를 겨냥한 배상 압박 움직임과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금감원은 옵티머스 전체 펀드 규모 대비 예상 회수율이 최소 7.8%(410억원)에서 최대 15.2%(783억원)에 불과하다고 밝히며 "피해자 구제를 위한 분쟁조정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가 지난 8월 '라임무역금융펀드 원금 100% 반환' 결정을 내린 것처럼 또 다시 강도 높은 분쟁조정안을 내놓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함께 금감원은 투자자 피해 구제를 위한 분쟁조정안 법리 검토에도 착수했다. 금융권에선 '착오에 의한 계약취소'를 옵티머스 펀드에도 적용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미 옵티머스 펀드를 판매한 금융사들은 자체 보상안을 내놓는 등 금감원의 고강도 제재에 대비하고 있는 상황이다. 옵티머스 펀드 최대 판매사인 NH투자증권은 투자자에게 원금의 30%~70%를 지원하기로 약속했고, 한국투자증권은 투자자에게 조건 없이 원금의 70%를 선지급한데 이어 나머지 30%에 대해 소비자보호위원회를 거쳐 추가로 20%를 지급하기로 했다.


'보상 만능주의' 위험수위…"투자도 환불 가능하단 믿음 싹틔워"


문제는 책임을 판매사에게만 물었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금융권에선 환매 중단을 일으킨 주요 사모펀드의 손해액과 회수율은 물론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피해보상 책임을 판매사에게만 지우는 것은 시장질서 자체를 흔드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실제 금융당국이 금융사의 팔을 비트는 '보상‧규제 만능주의'에 빠진 사이 투자자의 자기 책임 원칙이 무너지는 장면은 곳곳에서 연출됐다. 최근 빅히트 주가가 급락해 손실을 본 개미들이 환불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을 올리고, 온라인상에서 모임까지 만들어 환불을 요구한 사태가 대표적이다.


금융권에선 단순히 투자열풍이나 시장에 대한 이해부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현상이라고 보고 있다. 금융사 한 임원은 "금감원이 사상 처음으로 라임펀드 100% 배상 권고를 하고, 일련의 사모펀드 환매중단 사태에서 판매사가 책임지고 보상하라고 한 사례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투자상품에도 보상이나 환불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이 싹튼 것"이라고 지적했다.


민간 증권사 한 애널리스트는 "사모펀드 운용사가 설계대로 운용하지 않고 사기를 친 건 명백하지만 판매사가 개입했다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금융당국은 판매사에게 원금을 돌려주라는 압박을 계속하고 있다"며 "이번 사모펀드 사태는 금융당국이 잘못된 투자인식을 설파함으로 인해 시장 질서를 어지럽힌 사례로 기록될 수도 있다"고 꼬집었다.

이충재 기자 (cjlee@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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