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에서 사랑하고, 떠나며 열병을 앓다
이석원 기자 (galamoi@dailian.co.kr)
입력 2014.06.21 10:39
수정 2014.06.21 10:42
입력 2014.06.21 10:39
수정 2014.06.21 10:42
<유럽에 미치다⑬-이탈리아 피렌체2>르네상스 예술의 고향
“이 도시의 아름다움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정신을 잃게 한다”
프랑스의 대문호 스탕달은 1817년 이탈리아 피렌체를 여행하던 중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는다. ‘사람을 병들게 하고 정신을 잃게 한다’는 이 도시에 대한 그의 얘기는 예찬일까? 저주일까? 물론 예찬이다. 그것도 그가 표현할 수 있었던 최고 수준의 예찬이다. 도대체 이탈리아 북부 고작 37만 남짓의 인구를 지닌 이 자그마한 도시가 어떻길래 스탕달은 ‘병들고 정신을 잃게 한다’고 했을까?
유럽 역사에 있어서 흔히 ‘암흑기’라고 표현하는 중세.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로마 제국이 급속히 쇠락하기 시작한 서기 5세기 무렵부터 동로마제국이 멸망하는 시기인 15세기 중반까지 약 1000년은 인간의 존엄성이 신의 가치에 의해 철저히 배척되고 유린되던 시기다. 모든 문화는 오로지 신 중심으로 이뤄졌고, 신에 의해 선택된 몇몇의 인간, 예컨대 성직자와 왕족과 귀족을 제외한 인간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가차 없이 희생됐다.
그렇게 신을 위해 과감히 희생되던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고, 최고의 가치가 되기 시작한 것이 15세기 중엽이고, 역사는 혁명과도 같은 이 시기를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길목, 즉 르네상스 시대(Renaissance Age)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흐름은 1000년 이상 철저히 신의 땅이었던 이탈리아 북부 피렌체에서 시작됐다.
피렌체의 역사는 무척 길다. 기원전 5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니까 2000년이 훨씬 넘는다. 고대 로마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르노 강에 식민지를 세우면서 보라색 꽃으로 뒤덮힌 이곳을 ‘꽃피는 마을’이란 뜻의 ‘플로렌티아’라고 불렀다. 피렌체가 영어로 ‘플로렌스’인 것도 여기서 유래한다.
고대 로마의 병영 도시였던 피렌체가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가장 막강하고 강력한 공국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14세기 중반 메디치 가문에 의해서다. 시골 동네 약장수 출신인 메디치가의 조반니 디 비치라는 인물이 금융업으로 돈을 벌기 시작해 막대한 재산을 형성했다. 15세기에 들어서 그의 아들인 코지모 데 메디치와 증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를 거쳐 무려 350년 동안 피렌체를 지배한 메디치 가문이 도시를 발전시키고 영광을 심어놓은 것이다.
바로 그 코시모와 로렌초의 시기, 메디치 가문은 당시 피렌체 출신의 천재 예술가들을 적극 지원했고, 그 천재들에 의해 인간의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브루넬레스키, 단테, 마키아벨리 등 르네상스를 만들고 빛낸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피렌체 SMN역. 정식 명칭은 피렌체 산타마리아 노벨라 역이다. 역 바로 옆에 있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Cheista di Santa Maria Novella)’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피렌체 중앙역인 셈이다. 대체로 피렌체 여행은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한다.
피렌체 중앙역에 도착한 여행자들의 99%는 천천히 걸어서 한 곳을 향해 간다. 그곳으로 가는 판자니 거리(Via Panzani) 양 옆에는 피렌체의 장인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진정한 명품 가게들이 즐비하다. 예컨대 ‘보욜라(Bojola)’와 같은 수제 가죽제품 가게는 흔한 명품처럼 돈만 있으면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찬란하게 빛나는 피렌체 고유의 명품 가게들을 지나다보면 길이 끝나는 저 편에서 엄청나게 크고 아름다운, 진정 피렌체를 피렌체라고 불리게 만드는 꽃봉오리가 피어오른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Santa Maria del Fiore) 대성당’, 즉 ‘두오모(Duomo)’가 저 멀리에서 보인다. 이쯤 되면 여행자들은 심박수가 갑자기 올라가기 시작하고, 주위를 찬찬히 둘러볼 여유 없이 발걸음이 빨라진다. 마치 피렌체에 온 유일한 이유가 저 ‘꽃의 성모 성당’을 만나기 위해서인 것처럼.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두오모에서 여행자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순백의 새하얀 대리석이 눈앞을 가로막고, 숨 쉬는 것조차 불경하게 느껴지는 신성함으로 가득한 르네상스 최고의 걸작이 발걸음을 막는 것이다. 그리고, 1년 365일 언제나 그 찬란한 ‘꽃’으로 들어가기 위한 엄청난 사람들의 물결을 보게 되고, 그 속에서 ‘신을 위한 인간’이 아닌 ‘인간을 위한 신’의 거룩한 처소를 앙망하게 된다. 그렇게 거짓말처럼 눈앞에 펼쳐진 극단의 아름다움 앞에서는 압도돼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높이 고개를 들고 그것을 쳐다보게 된다. 르네상스의 정신처럼.
르네상스가 채 시작하기도 전인 1296년 공사가 시작된 두오모는 170년 동안 지어진다. 한꺼번에 3만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두오모는 흰색과 분홍색, 그리고 녹색의 대리석이 기하학적인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두오모가 처음 지어졌을 때부터 르네상스의 정신이 담긴 것은 아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산타 레파레타 성당이 있었는데, 이를 허물고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성당을 지으려 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간이 아닌 신의 의미가 더 강조된. 그러다가 두오모가 거의 다 완성된 후 맨 마지막으로 피렌체가 낳은 천재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lippo Brunelleschi)가 손대기 시작한 것이 쿠폴라(Cupola)다. 당시 건축 기술로는 내부에 버팀목을 설치하지 않고 공의 반쪽 모양을 한 거대한 쿠폴라를 만들 수 없었다. 그런데 브루넬레스키는 로마의 판테온을 공부한 후 반구형 지붕에 대한 비밀을 풀어냈다. 외벽과 내벽의 이중 구조에 벽돌은 불규칙하게 얽기 설기 쌓았고, 각각의 벽돌이 다른 벽돌을 지지하는 형태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당시로는 파격을 넘어 혁명적인 건축기법이었고, 두오모의 쿠폴라를 완성함으로써 브루넬레스키는 르네상스 건축 예술의 완성자가 된다.
특히 쿠폴라의 안쪽 면을 장식하고 있는 바사리(Vasari)의 천정 프레스코화 ‘창세기’와 ‘최후의 심판’은 로마 바티칸의 시스티나 경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정화 ‘천지창조’와 벽화 ‘최후의 심판’에 비견될 정도로 대단한 미술작품으로 평가된다.
두오모 앞의 광장은 피렌체에서 언제나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또 지나가는 길이지만 그들은 거기에 머물기만 하지는 않는다. 15세기 르네상스를 그대로 품고 있는 거리에 현대적인 화려한 상점들이 즐비한 칼자이우오리 거리(Via del Calzaiuoli)를 흥겨운 마음으로 걷다보면 과거 피렌체 정치와 사회의 중심지 역할을 한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이 나온다.
아무리 르네상스라고 해도 두오모가 신의 공간이라면 시뇨리아 광장부터는 진정한 인간의 공간이다. 이곳은 과거 피렌체 시민들이 토론을 벌이고 직접 민주주의에 의한 의사 결정을 하던 곳. 두오모, 조토의 종탑과 더불어 피렌체에서 가장 높은 탑이 있는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과 함께 광장을 두르고 있는 코지모 데 메디치의 청동 기마상, 넵투누스의 분수, 다비드와 헤라클레스, 그리고 르네상스의 보물 조각들이 여행자를 다시 행복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시뇨리아 광장에서 눈에 띄는 것은 미켈란젤로의 3대 걸작 중 하나로 통하는 다비드상. 물론 다른 조각품들과 마찬가지로 모작이다. 진품은 인근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다. 하지만 원래 이 자리에 진품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다만 오래전 강풍에 날아든 판자에 다비드의 왼손이 부서지고, 한 정신병자가 왼쪽 엄지발가락을 망치로 부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 후 이 자리에 모조품을 세워놓은 것이다. 우스운 것은, 모조품이 세워진 이후 모조품에 대해 사람이든 자연이든 그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는 것.
베키오 궁전을 바라보고 오른쪽에는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이 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비롯해 르네상스를 빛낸 위대한 미술가들의 작품 2500점이 전시된 이곳도 아픔이 있다. 세계 1, 2차 대전을 비롯해 숱한 전쟁들도 우피치 미술관을 비켜갔었는데, 1993년 엉뚱한 테러로 인해 상당한 파괴를 입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불던 반마피아 운동에 대해 마피아 조직이 폭탄 테러를 저지른 것인데, 이 테러로 생후 50일 된 갓난아기를 비롯해 5명이 사망하고, 루벤스의 방이 큰 손상을 입었다.
우피치 미술관을 통과하면 비로소 피렌체의 젖줄인 아르노 강이 나오고,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의 이야기가 깃들여 있는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가 여행자를 맞는다. 아르노 강의 여러 다리들 중 가장 오래된 다리인 베키오 다리는 여느 다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밖에서 보면 특이한 다리로 보이지만 다리 위에 올라서면 그냥 상점이 가득한 거리로 보인다. 다리 양 옆으로 화려한 보석상들이 즐비해 여행자들의 발걸음을 잡는데, 그런 탓에 서 있는 곳이 강 위의 다리라는 것이 전혀 실감나지 않는다.
14세기에 만들어진 베키오 다리 위에는 원래 보석상이 아닌 푸줏간들이 즐비했다. 그런데 너무 비위생적이고 냄새가 지독하다보니 당시 피렌체의 지배자였던 페르디난도 1세가 푸줏간을 전부 없애고 금은 세공품과 보석상이 들어서게 했다. 이 때문에 피렌체가 세계 최고의 금은 세공 기술을 갖게 됐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금은 세공을 배우려는 이들이 피렌체를 찾는 이유다.
베키오 다리와 이어진 귀치아르디니 거리(Via Guicciardini)는 피렌체 먹거리의 천국이다. 길 양 옆으로 수없이 이어진 젤라토(Gelato) 가게, 길거리에서 잔술로 마실 수 있는 와인가게, 진한 향이 멀리서부터 사람을 잡아끄는 노천카페의 에스프레소, 그리고 우리나라 돈으로 6만원 남짓이면 무려 1kg에 달하는 ‘피렌체 스타일 티본스테이크’로 배부를 수 있는 레스토랑이 지천이다. 10대와 20대의 젊은이들은 물론 7, 80대의 어르신들, 피부색과 국적을 불문하고 가장 행복한 여행의 순간을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길의 한 쪽에서 만날 수 있는 웅장한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 피티 궁전(Palazzo Pitti). 두오모 근처에 있는 메디치가의 정궁인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Palazzo Medici Riccardi)에 대적하기 위해 부유한 은행가인 루카 피티가 브루넬레스키에게 의뢰해 지은 이 궁전은, 그러나 메디치가를 이겨보겠다는 피티의 야무진 꿈과 달리 루카 피티의 죽음과 그 후손들의 파산으로 결국 메디치가로 팔리게 된다.
피티 궁전 안으로 들어가면 전형적인 이탈리아 양식의 정원인 보볼리 정원(Giardino di Boboli)이 있고, 정원을 산책하며 걸어 위로 올라가면 피렌체를 방어하던 군사 시설인 벨베데레 요새가 있다. 피렌체에서 가장 멋진 전망대 역할을 하는 곳 중 하나가 벨베데레 요새다. 지금은 미술관으로 사용되는데, 정작 미술품에 대한 관람보다도 요새이 맨 꼭대기에서 피렌체 시내를 내려다보는 것이 더 멋진 여행이 되기도 한다.
베키오 궁전 왼쪽 골목인 콘도타 거리(Via della Condotta)를 거쳐 앙귈라라 거리(Via della Anguillara)를 걷다보면 각양각색의 기념품 가게와 중세 시대 노트와 필기도구를 파는 멋들어진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또 피렌체를 대표하는 가죽 제품의 명가인 페루자의 상설매장을 지나다보면 시뇨리아 광장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넓은 산타 크로체 광장(Piazza Santa Croce)이 나오고, 또 다시 순백의 아름다운 대리석 파사드가 눈부신 산타 크로체 교회를 보게 된다.
이곳엔 피렌체의 위대한 천재 미켈란젤로의 무덤이 있다. 뿐만 아니라 갈릴레오 갈릴레이, 마키아벨리, 그리고 작곡가 로시니의 무덤도 있다. 피렌체에서 추방돼 객지를 떠돌다가 객사해 라벤나의 교회에 묻힌 ‘신곡’의 저자 단테는 이곳에 무덤은 없지만 기념 가묘가 있다.
그런데 산타 크로체 교회에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흔히 뛰어난 미술품이나 예술작품을 봤을 때 순간적으로 아찔한 기분이 들면서 정신이 혼미해지고, 심지어는 몸에 통증을 느끼면서 분열 증상을 일으키는 것을 ‘스탕달 신드롬(Stendhal Syndrome)’이라고 하는데, 산타 크로체 교회에서 유래된 것이다. 1817년 피렌체를 여행하던 프랑스의 문호 스탕달은 산타 크로체 교회를 둘러보던 중 귀도 레니라는 사람의 ‘베아트리체 첸치’라는 그림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림을 보고 나온 스탕달은 갑자기 다리의 힘이 풀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황홀경을 겪는데, 스탕달 신드롬이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해가 질 무렵이 되면 피렌체 사람들이든 피렌체를 여행하는 사람들이든 약속이나 한 듯 한 곳으로 모인다. 산타 크로체 교회 부근,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의 남자 주인공 준세이가 자전거로 넘나들던 그라지에 다리를 건너서 높지 않은 언덕을 오르면 시뇨리아 광장에서 봤던 것과는 또 다른 다비드상이 있는 넓은 공간이 나오는데, 바로 미켈란젤로 광장((Piazzale Michelangelo)이다.
마치 열병이라도 앓듯, 또는 몽유병에 걸린 사람이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곳으로 홀리듯 끌려가는 곳. 해질 무렵 이곳에 오지 않으면 사랑이 산산조각이 날 것 같은 연인들부터 잃어버린 사랑이 가슴 아파 홀로 울 곳을 찾아야 하는 슬픈 사람들까지도 슬며시 모여 드는 곳. 사람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피렌체 여행의 마무리를 위해 이곳을 찾는다고도 한다. 그렇게 끌리듯 찾아간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목격하게 되는 것은, ‘왜 피렌체가 꽃의 도시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리고 그 꽃은 해가 지고 도시에 어둠이 드리워도 지기는커녕 더 찬란하게 피어난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아르노 강 위의 베키오 다리에서부터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과 베키오 궁전의 첨탑을 거쳐 산타 크로체 교회에 이르는 파노라마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행복이 거기에 있다. 왠지 그곳에서 피렌체를 바라보면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사랑까지 되돌아올 것 같은 착각으로 한없이 행복해지는 곳. 그래서 사람들은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간직한 사랑을 확인하기도 하고, 다가올 사랑을 기약하기도 하고, 떠나간 사랑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피렌체에 대해서 이렇게 애기한다. “피렌체는 베네치아처럼 스쳐지나가는 사람에게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2주 동안 피렌체에 있었던 릴케는 그 짧은 시간이 못내 아쉬웠으리라. 그는 피렌체의 속살을 채 들여다보지 못하고 신음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신을 위한 인간이 아닌 인간 속에서 존재하는 신으로 위대해진 피렌체를 더 그리워했으리라. 피렌체를 떠나는 사람들이 붉게 피어오른 꽃의 도시에 대한 심한 상사병을 앓듯이.
이석원 여행작가 /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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