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위에 마법의 별 4개가 떠오르면 끝내...

최진연 기자
입력 2013.07.21 13:09 수정 2013.07.21 13:21

<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500년 도읍지의 수호신 한양 목멱산봉수

“황혼 무렵 서울거리로 나선 나그네의 시선은 남산에 멎게 된다. 어둠속에 묻힌 산은 마법에서 풀린 듯 갑자기 꼭대기에 별 네 개를 토해낸다. 산봉우리에서 반짝이는 별 네 개를 볼 때면 자신도 모르게 어떤 전율을 느끼리라. 다른 세상에서 오는 빛이라고 생각될 만큼 타오르는 빛은 실은 별이 아니다. 봉화다. 모든 일이 잘 돼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용 횃불인 것이다.


봉화는 꼭 위험을 경고하는 것만 아니다. 평상시 조선전역을 통해 만사가 평화롭다는 신호로도 사용된다.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전갈들을 장안에 알리기 위해 약 15분정도 타오르다가 다시 어둠속으로 사라져 간다. 남산봉수대는 전국 방방곡곡에 뻗쳐 있는 봉화들의 집결지로서 소위 횃불 전신술의 마지막 지점이다.“

이 글은 1884년, 조선을 방문한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 에서 밝힌 내용이다.

또한 1890년에 방문한 스물다섯 살의 영국 화가 새비지 랜도어(Savage Landor)는 그의 저서에서 서울의 남산을 이렇게 소개했다.

“남산 꼭대기에 감시인이 살고 있는 보잘 것 없는 오두막집이 자리하고 있다. 이 앞에는 다섯 개의 돌무더기가 세워져 있는데, 그 위로 횃불이 조선왕국의 한쪽 끝에서부터 다른 끝단까지 전달된다. 즉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안전이 이 다섯 더미의 돌에 달려 있어 어두워진 밤, 적막 속에서 타오르는 불을 지켜보는 것은 아름답고 기묘한 모습이었다.


조선에 지정된 모든 봉우리에서 이와 같은 횃불신호를 보내면 왕은 수도로부터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계속 파악하고 있다“ 며 눈에 비친 남산봉수의 모습을 전했다.

조선 말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의 눈에 비친 목멱산의 봉수대, 그들은 봉화가 올라가는 야릇한 광경을 본 느낌을 이렇게 글로 남겼다.

남산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 풍수지리상 남쪽을 지키는 주작(朱雀)에 해당되는 중요한 산이었다. 당시 이름은 목멱산이었지만 도성(都城)의 남쪽에 있으니 남산으로 더 많이 부른다. 이곳에 봉수대가 설치된 것은 조선 세종 5년(1423)이다. 봉수는 병조(지금의 국방부)의 요청에 따라 남산등성이를 따라 모두 5곳에 설치되었다. 이는 전국에서 출발하는 다섯 갈래의 횃불 종착역이 남산이며, 도착하는 위치가 각각 달랐기 때문이다.


함경도에서 출발한 제1노선의 봉화 도착지는 남산 동쪽 1봉인 현재 미군통신 탑 부근이다. 부산서 출발한 제2노선 봉화는 남산골한옥마을이 내려다보이는 2봉에 도착했다. 평안도내륙을 따라온 제3노선의 봉화는 현재의 봉수대가 있는 자리다. 제4노선은 평안도해안을 경유해 남산 케이블카종점 부근이다. 제5노선은 전라도 여수를 출발해 서해안을 타고 올라와 남산분수대 주변에 도착했는데 일제 때 조선신궁이 있던 곳이다. 이들 봉화의 도착지는 왕궁에서 볼 때 한눈에 조망되는 장소다.

목멱산 봉수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이곳에 집결해 임금께 보고되기 때문에 경봉수라는 명칭이 붙었다. 하지만 목멱산봉수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제대로 불을 올리지 못했고 기능이 마비돼 갔다. 그 후 1885년 전신, 전화 등의 근대적인 통신이 도입되자 고종 32년(1895))왕명으로 500년 도읍지를 지켜온 목멱산봉수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봉수대의 석축시설과 조선중기까지 봄, 가을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국사당도 일제가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조성하면서 모두 파괴시키고 말았다. 현재 남산 팔각정 아래 복원된 봉수대는 수원화성의 봉돈을 참고해 1993년에 세웠다. 이제 목멱산봉수는 수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의 기념사진 찍는 장소로 서울 한양도성과 함께 남산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 됐다. 이곳에서 매일 오전 11시 30분부터 한 시간 동안 전통 봉수의식이 진행된다.

최진연 기자 (cnnpho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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