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조 국민성장펀드, 첫 공개된 신청서 뜯어보니…심사양식 마저 ‘반쪽’
입력 2025.12.12 07:10
수정 2025.12.12 07:10
20년 상환 공공부채 기반 사업…심사 틀은 ‘초기 단계’
장기 공공부채 구조 대비 ‘초기 물량 집행’ 기조에 우려
“큰 포부 대비 준비는 초기 단계…제도 보완 필요”
150조원 규모 첨단전략산업기금 사업이 시행되면서 국민성장펀드가 지난 11일 공식 출범했다. 하지만 정작 중장기 투자체계와 구체적인 리스크 관리 구조는 미흡한 채로 출발했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반도체·AI 등 전략산업에 5년간 150조원을 투입하겠다며 야심찬 청사진을 제시했지만, 대규모 인프라 투자에서 핵심이 되는 위험 분담·책임 구조·계약 기반 심사체계는 아직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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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가 지난 9일 처리한 ‘2026년 첨단전략산업기금채권 국가보증동의안’에 따르면, 2026년 한 해만 20년 만기 기금채 15조원을 발행한다.
2027~2030년까지의 연간 발행 한도 추계도 함께 포함돼 있어 국민성장펀드가 단순한 임기 내 정책이 아니라 2040년대까지 상환 부담이 이어지는 장기 공공부채 구조임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금융위원회는 이날 출범식에서 “5년간 균등 집행이 아니라 초기 적극 지원”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시장에서는 “정권 임기 동안 성과를 앞당기기 위한 초반 물량공세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문제는 심사·집행 체계의 세밀함이 뒷받침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산업은행 국민성장펀드 사무국이 1~2일 공개한 ‘첨단전략산업기금 지원신청서(대출·인프라)’를 분석한 결과, 서식 자체는 기업 개요·기술·시장성 등 일반 서술 중심으로 구성돼 있으며, 대규모 프로젝트의 구조적 리스크를 체계적으로 검증하는 템플릿은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프라 금융용 신청서에는 전력·임대차·환경·환율 등 특정 위험을 서술하는 항목과 해지 시 지급금 구조를 적는 란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금융권에서는 이를 “프로젝트 리스크를 개괄적으로 정리하는 수준”으로 본다.
반면, 대규모 인프라·전략산업 프로젝트에서 기본적으로 검증해야 할 ▲SPC(특수목적법인) 지분 구조 및 출자자 책임 ▲사업자·시공사·운영사 간 위험 배분표(Risk Matrix) ▲EPC(설계·조달·시공) 계약의 핵심 조건 ▲운영·유지보수(O&M) 구조 ▲자본 스택(Senior–Mezzanine–Equity) 구성 등을 체계적으로 요구하는 별도 템플릿은 포함되지 않았다.
표면상 ‘현금흐름표’나 DSCR(부채상환커버리지비율) 항목은 존재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구체적 계약 구조·위험 분담 체계·운영능력 검증 요소가 서식 단계에서부터 충분히 세분화돼 있지 않은 것이다.
금융권에서는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는 결국 숫자보다 ‘구조’가 핵심”이라고 입을 모은다.
SPC 지분 구조를 보면 “누가 어디까지 책임지는지”, EPC·O&M 계약을 보면 “짓고 나서 실제로 돌아가는 사업인지”, Risk Matrix를 보면 “문제 발생 시 손실을 누가 감당하는지”가 드러난다.
또 이러한 핵심 구조에 대한 검증을 외부 용역 보고서에만 의존할 경우, 사업 구조가 부실해도 겉보기에 그럴듯한 사업에 돈이 들어갈 위험이 커진다는 게 시장의 시각이다.
절차적 투명성에 대한 지적도 제기된다. 현재 공개된 신청서와 가이드라인에는 구체적인 접수 기간, 심사 소요 기간, 세부 평가 기준표, 기금 지원 금액 등이 명시돼 있지 않다.
같은 정책기금인 수출입은행 공급망안정화기금이 접수일·심사일·선정 결과 통보 절차를 공고하고, 기금 계획서 샘플 안 등을 참여 기업에게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기업이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갖고 있어도 프로젝트 구조가 부실하면 실패할 수 있다”며 “초기 설계에서 리스크 분담을 명확히 해야 실패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데, 현재 양식은 구조적 검토 틀 자체가 초기 단계”라고 말했다.
정책펀드의 특성상 초기에 잘못 배분된 자금은 회수까지 10~20년이 걸린다. 전문가들은 “기금이 장기 부채 기반인 만큼 ‘속도전’보다는 정교한 선별·평가 체계 확립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국민성장펀드가 본래 취지대로 운용되기 위해서는 ▲심사 기준의 구체적 공개 ▲리스크 평가모형의 정교화 ▲접수·심사 절차 명확화 등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인프라 투자는 사업 목적에 맞춰 SPC를 세우고 지분형 구조를 짜는 것이 기본인데, 지금 심사서류에는 이러한 중요한 항목이 아직 충분히 반영돼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큰 포부에 비해 준비는 이제 시작 단계에 가깝다. 시간이 지나면 보완되겠지만, 현재로선 준비가 전혀 안된 상황”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