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이’ 떠난 자리, 다시 타오르는 여성국극 불씨 [다시, 여성국극①]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5.01.29 14:00
수정 2025.01.29 14:00

김태리 주연 드라마 '정년이' 흥행...여성국극 소재 관심

'전설이 된 그녀들' '벼개가 된 사나히' 등 여성국극 공연 잇따라

2월 여성국극 영화 '왕자가 된 소녀들' 개봉 앞둬

1950년대 여성국극단의 이야기를 그린 웹툰 ‘정년이’는 뮤지컬로, 또 드라마로 연이어 제작되면서 주목받았다. 생소한 소재에 대한 높은 관심은 수치로도 드러났다. 특히 김태리 주연의 드라마 ‘정년이’는 방영 이후 내내 TV 전 채널 동시간대 1위를 지켰고, 마지막회는 자체 시청률 최고인 16.5%를 기록했다. OTT 중심 시장에서 오랜만에 TV 드라마의 흥행 대작의 등장이라는 점, 여성 서사 중심, 신인 여배우 중심 드라마라는 점 등 이 작품이 남긴 의미 역시 컸다.


ⓒtvN

그중에서도 ‘정년이’가 일으킨 가장 큰 반향은 잊힌 예술로 읽혔던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 제고였다. 이는 ‘정년이’를 연출한 정지인 감독이 작품을 내놓기 전부터 목표한 부분이기도 했다.


여성국극은 1948년 여성 국악인들이 모여 결성한 여성국악동호회에서 출발했고, 195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여성 배우들만 출연해 모든 배역을 소화하는 독특한 형식으로 창·무용·연기가 어우러진 종합예술로, 극중 ‘꽃미남’ 캐릭터는 현재의 아이돌을 뛰어넘는 팬덤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대중화된 TV와 영화의 등장으로 급격히 쇠퇴했다. 그런데 단순히 환경의 변화뿐 아니라 내부적 한계도 있었다. 남역 배우로 이름을 날린 임춘앵에 대한 지나치게 높은 의존도가 대표적이다. 당시 임춘앵의 개인사와 건강 등의 이유로 스타성을 잃었고, 그의 뒤를 이을 스타가 부재하면서 여성국극도 내리막을 걸었다.


또한 여성국극단의 상업적 성공이 오히려 발목을 잡기도 했다. 너도나도 여성국극단을 만들면서 공연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아졌다는 평가다. 일각에선 여성국극이 기이한 통속예술 취급을 받으면서 국가지원에서 배제되고,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까지 나오며 대중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정지인 감독은 “여성국극이라는 장르가 있다는 걸 확실히 알려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갖고 촬영에 있했다”며 “처음에는 다소 가벼운 마음도 있었지만, 자문해주신 정은영 작가님과 조언과 시범을 보여주신 조영숙, 이옥천 선생님을 직접 뵈면서 이렇게 흥했던 장르가 사라진 데 대한 안타까움이 생겼다.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잘 보여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여전히 여성국극의 명맥을 잇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시는 분들이 있는 상황에서 드라마의 방영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높아졌다면 정말 다행”이라고 말했다.


'한국 최초 여성 오페라, 전설이 된 그녀들' 시연하는 여성국극 원로배우 남덕봉(왼쪽부터), 이옥천, 홍성덕, 이미자 ⓒ뉴시스

드라마 방영 이후 여성국극의 불씨를 다시 타오르게 하려는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반세기 넘게 외면받으며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만큼,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동시에 현대적인 감각을 더해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인 셈이다.


지난해 연말에 개최된 ‘한국 최초 여성 오페라, 전설이 된 그녀들’ 특별 공연은 매진을 기록하며 추가공연까지 진행됐다. 90세가 넘는 여성국극 1세대 배우들이 출연해 ‘선화공주’를 비롯한 여성국극 대표 레퍼토리들을 선보이며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과 향수를 선보였다.


최근엔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된 여성국극 ‘벼개가 된 사나히’가 아르코예술극장에서 공연됐다. 젠더퀴어 소년이 여성국극 배우가 되는 과정을 그리면서 동시대 여성국극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여성국극이 단순히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다양한 이슈를 담아낼 수 있는 유연한 예술의 형식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의미한 작품이다.


이밖에도 오는 2월에는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영화 ‘왕자가 된 소녀들’도 개봉을 앞두고 있다. 1950년대 여성국극 스타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여성국극의 역사를 재조명할 것으로 기대된다. 영화는 여성국극의 잊혀진 역사를 발굴하고, 그 가치를 재평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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