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까지는 만나보자, ‘하얼빈’ 눈길 뺏는 2인 [홍종선의 명장면㉖]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입력 2025.01.21 15:42
수정 2025.01.21 18:58

영화 ‘하얼빈’의 두 배우, 이동욱과 조우진(왼쪽부터) ⓒ이하 CJ ENM 제공

영화 제목이 ‘하얼빈’이다. 1909년 10월 26일 제1대 조선통감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처단하기 위한 하얼빈 거사를 준비했던 모든 독립운동가, 대한의군이 주인공인 작품이다.


배우 현빈의 안중근, 단연코 무게감 있다. 그러나 주인공만으로 영화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아니, 진정한 1번 주연이야말로 영화의 바탕이자 이야기 수레를 끄는 역할이고, 강렬한 캐릭터나 눈길 끄는 장면은 동료들에게 맡겨지기도 하고 주연급이나 조연 배우가 수행해내야 하는 임무이기도 하다.


영화 ‘하얼빈’(감독 우민호, 제작 ㈜하이브미디어코프, 배급 CJ ENM)에는 그 책무를 훌륭히 완수한 배우들이 많다. 심지어 영화 초반을 처절하게 장식하는 신아산 전투의 마지막, 텅 빈 눈으로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젓는 단역, 배우 장요훈마저 굉장하다.


많은 배우 가운데 콕 집어 2인을 말하는 것은 한 배우에게 매우 중요한 대사, 다른 배우에게는 함축적으로 의미 있는 장면이 맡겨졌고 두 배우는 인상 깊은 표현으로 명장면을 완성해내서다.


대한의군 이창섭 역의 배우 이동욱 ⓒ

먼저 배우 이동욱. 이동욱에게는 사사건건이라 할 만큼 안중근의 판단과 선택에 이의를 제기하는 인물 이창섭이 맡겨졌다. 주인공 안중근과 날 선 대척점을 이뤄야 하는 만큼 현빈 이상의 무게감을 드리워야 했는데, 잘생기고 연기력 좋은 줄은 알았으나 이동욱이 이토록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배우였던가 싶은 ‘발견의 기쁨’을 안긴다.


게다가 이창섭의 이의제기가 단지 사사로운 감정에 의한 딴죽이 아니라 군사 작전상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한 지적이자 제안으로 관객이 받아들여야 하고, 그러면서도 안중근의 도덕성을 해치지는 않게 선을 지켜야 했는데 배우 이동욱은 그 절묘한 ‘비판의 선’을 진정 알맞게 연기했다.


그러했기에 그 누구보다 결정적으로 감독 우민호가 주목하고 배우 현빈이 표현한 안중근에게 치명타를 안긴다. 안중근의 사람에 대한 신뢰를 바탕에 둔 인본주의와 만국공법에 따른 일본군 포로 대우의 세계주의가 평범한 우리의 눈에는, 더구나 전우들의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는 실현되기 힘들고 추구해서도 안 되는 비현실적 몽상주의로 비추는지 적나라하게 부각시킨다.


그래놓고 마지막 순간 우리를 다시, 단박에 설득시킨다. 안중근의 만국공법 포로 대우에 따라 소중한 생명을 건져놓고도 안중근의 깊은 뜻대로 아내와 아이들에게 남편과 아버지로 돌아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치욕적 목숨 연장을 받았다는 듯 안중근 잡기에 혈안이 된 일본군 소좌 모리 다쓰오(박훈 분)를 향해 가하는 일침이다.


“안중근, 안중근, 안중근! 안중근이 네놈 입에서 떠나질 않는구나. 넌 이등이의 암살은 관심도 없고 오로지 안중근을 잡고 싶은 거야. 하긴 저보다 못난 놈한테 목숨을 구걸했다고 생각하니 안중근을 잡아 죽이고 싶겠지. 근데 그거 아나? 안중근은 니놈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고결한 인간이라는 거! 니놈도 알고 있었구나, 하 하 하 하 하, 이 바보 새끼, 하하하!”


이창섭 본인조차 조국의 명운을 지키고 밝히기 위해 일본군과 목숨 걸고 벌이는 피비린내 나는 세계대전 안에서 현실적 선택을 수행한 것이었을 뿐, 안중근의 철학이 옳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내심으로는 진정 존경하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일본군 소좌도 알고 있던 안중근의 고결함을 우리에게 강력히 주창하는 외침이다.


우민호 감독이 영화 ‘하얼빈’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 안중근이 진정 위대한 이유는 일제의 첨병 이등박문을 죽여서가 아니라 그 어떠한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고결함,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를 헷갈릴 수밖에 없는 수많은 전장의 선택에서도 잊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름 아닌 안중근과 대립각을 세우던 이창섭의 절규를 통해 전한다.


그 반전의 절규를 배우 이동욱은 그렁그렁 솟구치는 눈물을 사슴 같은 큰 눈에 안고 목숨과 맞바꾸는 절실함으로 비장하게 외친다. 명연기로 영화의 주제의식이 집약된 명대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대한의군 김상현 역의 배우 조우진 ⓒ

그리고 배우 조우진. 또 하나의 반전을 품은 김상현을 연기한 조우진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명장면을 만들었다.


영화 ‘하얼빈’에는 관객 저마다의 명장면을 품을 수 있게 인상적 장면들이 많다. 마치 로마 가톨릭에 반기를 드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주도한 마르틴 루터의 신앙 고백처럼 보이는, 한줄기 희미한 빛만이 존재하는 좁고 어두운 방에서 안중근(현빈 분)이 최재형(유재명 분)을 향해 토로하는 생명에 대한 고뇌와 끝없는 전진의 다짐은 ‘빛과 어둠의 마술사’ 램브란트가 그린 한 폭의 그림 같다.


그러함에도 개인적으로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고 싶은 것은 김상현이 모리 소좌 앞에서 고깃덩이를 씹는 장면이다. 이유가 있다. 모리 소좌가 던져주는 손톱만 한 고기 살점, 그리고 다시 내다 버리듯 던지는 고깃덩어리. 일본이 대한을 어떤 하대의 시선으로 바라봤는지, 일본인이 조선인을 어떻게 사람만도 못한 개 취급을 했는지 명징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김상현이, 배우 조우진이 그 굴욕의 고기를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메시지는 달라지고, 우민호 감독이 담고 싶었을 주제의식이 절절하게 관객에게 다가갈 수도 공중으로 휘발될 수도 있었다.


조우진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천년을 넘게 한반도를 넘보고 한민족을 유린했던 섬나라 일본을 잘근잘근 씹는다. 조상 대대로 우리 한민족의 마음에 켜켜이 쌓여 왔을 한을 씹어 뱉어 없애겠다는 듯 우적우적 씹는다. 치욕의 핏물은 목으로 넘어가지 않고 분노로 치솟아 부릅뜬 눈의 흰자를 붉게 적신다.


아, 이런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가 우리에게 있구나! 기대했으나 예상치 못한, 기대 그 이상의 열연으로 한국 영화사의 명장면이 탄생했다.


배우 이동욱에 대한 재평가를 목격하는 즐거움, 오래도록 사람들 입에서 회자할 조우진의 명장면을 내 기억에도 남기는 관람, 기왕이면 큰 스크린으로 만나보자. 길어서 더 좋은 설 연휴가 우리 눈앞에 있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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