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생명보다 '단일대오' 중요?…응급실 근무 의사 '블랙리스트' 등장

김인희 기자 (ihkim@dailian.co.kr)
입력 2024.09.10 02:29
수정 2024.09.10 02:29

응급실 근무의사 실명 악의적으로 공개하며 "감사와 응원 드린다" 조롱

피해 의사는 대인기피증 시달기기도…정부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

전국 곳곳에서 응급실 운영이 파행하는 가운데 정부가 4일 군의관 등 보강 인력을 긴급 배치했다. 이날 서울 양천구 이화여자대학교 목동병원에서 한 환자가 응급의료센터로 이동하고 있다.ⓒ연합뉴스

응급실 의사 부족으로 일부 상급종합병원에서 응급실을 제한운영하고 응급실 병상을 찾지 못해 '뺑뺑이 사망'까지 벌어지는 가운데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의 실명을 악의적으로 공개한 블랙리스트가 등장했다. 이 블랙리스트에는 추석 연휴를 앞두고 응급실 운영에 대해 국민들이 불안해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대명절 추석, 의료대란을 막기 위해 힘써주시는 분들께 감사와 응원을 드린다"며 비꼬는 글까지 달렸다.

정부는 이러한 블랙리스트가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라며, 경찰에 수사를 의뢰해 엄단하겠다고 밝혔다.


◇ '응급실 부역'이라는 글에서 근무 지속하는 응급실 의사, 파견 군의관 실명 공개


9일 연합뉴스 및 의료계 등에 따르면 의사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아카이브(정보 기록소) 형식의 한 사이트에는 '응급실 부역'이라는 제목으로 응급실을 운영하는 각 병원별 근무 인원이 일부 근무자 명단과 함께 게시됐다.


'감사한 의사 명단'이라는 제목의 이 사이트는 운영자가 제보를 통해 확보한 의료현장에 있는 의사들에 대한 정보를 모은 뒤 매주 업데이트하는데, 응급실 근무 의사 명단이 최근 새로 올라왔다. 전공의 이탈 사태 이후에도 병원에서 근무를 이어나가고 있는 전공의들의 실명과 출신 학교, 학번을 공개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명단에는 '000 선생님 감사합니다. 불법파업을 중단하고 환자 곁을 지키시기로 결심한 것 감사합니다' 식으로 근무 의사의 실명이 적혀 있다.


또 "복지부 피셜 '응급실 의사가 부족한데도 응급의료는 정상가동 중' 이를 가능하게 큰 도움주신 일급 520만원 근로자분들의 진료정보입니다", "인근 지역 구급대 및 응급상황에 처한 국민들에게 큰 도움 되리라 생각합니다" 등의 표현도 함께 적혀 있다.


명단에는 비슷한 형식으로 '군 복무 중인 와중에도 응급의료를 지켜주시는 선생님 감사합니다'라는 글과 함께 응급실에 파견돼 근무 중인 군의관으로 추정되는 의사들의 실명도 공개됐다.


최근 정부는 응급의학 전문의들이 포함된 군의관 15명을 응급실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병원에 보냈으나, 당사자들이 응급실 진료에 대한 부담 등을 호소하면서 모두 응급실 근무를 하지 않고 있다.


이 사이트에는 파견된 군의관이나 공중보건의(공보의)들의 명단과 함께 파견을 지원하거나, 연장을 희망한 사례를 중심으로 자세히 적혀 있다. 명단에는 "당직 서며 응급실 정상화 위해 노력 중", "x번 연장", "8명 중 7명이 병원에서 '쓸모없다'라고 판단돼 대체자 없이 지자체로 복귀한 와중에 유일하게 병원에서 쓸모를 인정받아 1개월 더 연장한, 정말 감사한 선생님입니다" 등의 표현이 달렸다.


응급실로 향하는 환자ⓒ연합뉴스

◇ 피해 의사, 대인 기피증까지…정부 "경찰에 수사의뢰해 엄단"


복지부는 이 사이트에 응급실 근무 의사, 파견 군의관·공보의 등의 신상정보가 공개된 사실을 경찰에 통보하고 수사를 요청할 계획이다.


정윤순 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의 실명을 악의적으로 공개하는 사이트가 진료현장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의 사기와 근로의욕을 꺾고 있다"며 "이는 환자의 생명을 지키는 의사들을 위축시키는,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라고 비판했다.


정 실장은 "이미 경찰에 수사 의뢰를 했던 사이트인데, 업데이트된 부분에 문제될 것(응급실 근무의사 신상공개 등)이 있어서 경찰에 전달했다"며 "의료현장에서 성실히 근무하시는 의사들을 악의적으로 공개하는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수사기관과 협조하여 엄단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일부 군의관은 이런 사건(신상공개)으로 말미암아 대인기피증까지 겪으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해당 군의관은 서울 지역 병원 응급실에 파견된 군의관으로, 한 의사 커뮤니티에 자신의 신상과 관련한 글이 올라오자 병원 측에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월 전공의들이 병원을 대거 이탈한 후 정부가 이들의 복귀를 촉구할 때마다 의료 현장에 있는 의사들의 리스트가 의사들의 인터넷 카페, 텔레그램 대화방 등에서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블랙리스트는 전공의뿐 아니라 복귀를 독려하는 의대 교수, 전공의들의 자리를 메워주는 전임의 등으로 넓어지고 있으며, 공개되는 사이트도 일반인이 볼 수 있는 수준으로 과감해지고 있다.


이번에 블랙리스트를 담은 '감사한 의사' 사이트도 일반인도 주소를 알면 열람할 수 있는 오픈된 아카이브다.


응급실 파견을 명령받고 병원에 도착한 군의관ⓒ연합뉴스

◇ 현장서는 환자 죽어가는데…'단일대오'만 강조하는 의료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의사들에 대해서는 명단 외에도 "불륜이 의심된다", "탈모가 왔다", "통통하고 정돈되지 않은 머리", "모자란 행동", "오지라퍼(오지랖이 넓은 사람)", "래디컬 패미니스트", "싸이코 성향" 등의 인신공격성 표현까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외에도 근무 의사들의 개인 휴대전화 번호가 적혀 있거나 좋아하는 프로야구팀, 사귀는 이성, 학부 대학, 아버지 이름, 고등학교 때 학교폭력을 당한 상황, 언제 신혼여행을 가고 출산휴가를 갔는지 등 자세한 개인정보까지 무분별하게 노출되고 있다.


이러한 신상공개로 인해 전공의들이 의료현장 복귀에 부담을 느끼거나 동료 의사집단에서 '왕따'를 당할까 두려워한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이 사이트는 의료계에 악의적인 글을 썼다면서 일부 기자들에 대해 이름, 기사 제목, 취재 활동 등도 함께 공개하고 있다.


한편 의료현장에서는 응급실 의사 부족 등으로 인한 '뺑뺑이 사망'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2일에는 부산의 공사현장에서 추락사고를 당한 70대 근로자가 수술할 의사를 찾지 못해 11개 병원을 돌던 끝에 사망했고, 5일 광주에서는 교정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된 여대생이 직선거리로 100m가량인 대학병원 응급실 대신 다른 병원 응급실로 이송됐다가 중태에 빠졌다.


폭염이 이어졌던 지난달 4일에는 만 2세 여아가 열경련으로 쓰러져 응급실 11곳으로부터 이송 거부를 당한 뒤 의식불명에 빠졌다. 이 아이는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김인희 기자 (ihkim@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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