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있으면 은행서 돈 못 빌린다…전세대출까지 '셧다운'
입력 2024.09.03 15:46
수정 2024.09.03 16:17
주담대 취급 제한 잇따라
한도 제한하고 만기 축소
무주택자 피해 확산 우려
급증하는 가계부채를 잡아야 한다는 금융당국의 주문에 시중은행들이 대출 문을 아예 걸어 잠그는 극약 처방을 내놓고 있다. 집을 갖고 있다면 대출을 내주지 않거나 최장 만기를 축소하는 등 주택시장으로 흘러가는 투기 수요를 막겠다는 취지다.
다만 일각에선 은행권의 초강수 대출 제한으로 향후 서울을 중심으로 아파트 전세 매물이 줄고 오히려 갭투자가 늘어나는 등 무주택자들의 피해가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3일 금융권에 따르면 국내 주요 시중은행은 가계대출 금리 인상에 이어 주택담보대출과 전세자금대출 취급을 앞다퉈 제한하고 있다. 이는 최근 가계대출이 빠르게 증가하자 금융당국이 브레이크를 걸겠다고 나선 영향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달 25일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은행에) 더 강하게 개입하겠다”는 경고성 발언을 한 후 은행들이 앞다퉈 대출 제한 조치를 쏟아낸 것이다.
특히 우리은행은 오는 9일부터 주택을 한 채라도 보유한 경우 서울 등 수도권에 주택을 추가로 구입하기 위한 목적의 대출을 전면 중단키로 하면서 사실상 대출 ‘셧다운’을 선언했다. 또 서울 등 수도권 내 전세자금대출도 전 세대원 모두 주택을 보유하지 않은 무주택자에게만 지원하기로 했다.
우리은행의 이같은 행보에는 금융당국의 페널티를 피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올해 가계대출을 전년 보다 2000억원 늘어난 115조4000억원 공급하기로 했으나, 실제로는 지난 달 21일까지만 해도 8000억원이 더 확대된 116조원을 공급하며 목표치를 376.5% 초과했다. 이런 추세라면 내년에는 강제로 가계대출 취급 한도를 줄이는 1호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앞서 금감원은 올해 가계대출 증가액이 목표치 대비 증가 폭이 클수록 내년도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한도를 제한하기로 했다. 차주별 DSR 한도를 낮춰 은행의 대출 한도를 강제로 줄이겠단 조치다.
우리은행을 시작으로 다른 은행들도 줄줄이 셧다운에 나설 가능성도 제기된다. 실제 전날 인터넷전문은행인 카카오뱅크는 주택을 한 채라도 보유한 유주택자에게 주택 구입 목적의 주담대를 내주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금융권에서 2021년과 같이 가계대출이 급증할 당시 은행들의 릴레이 셧다운이 재현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당시 우리은행은 8월부터 전세대출을 제한했고, 10월에는 농협은행과 하나은행이 신용대출과 부동산 구매 자금 목적의 대출을 중단했다.
이밖에 다른 은행들은 주담대 만기를 축소하거나 한도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가계부채의 제동을 걸고 있다. 앞서 KB국민은행과 신한은행은 주담대 만기를 만 34세 이하 50년, 그외 40년에서 최장 30년으로 축소했다. 국민은행은 지난달 29일부터 시행 중이며 신한은행은 내달 3일부터 적용한다. 대출 만기를 줄이면 연간 상환해야 하는 원리금이 늘어나면서 DSR이 상승해 대출 한도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국민은행과 하나은행, 우리은행은 생활안정자금 목적의 주담대 한도도 1억원으로 제한키로 했다. 기존에는 한도 제한이 없었다.
전세자금대출 문턱도 높아졌다. 국민·신한·우리은행은 임대인 소유권 이전 등 조건부 전세대출을 한시적으로 중단했다.
국민은행은 또 다음 달 3일부터 임대차계약 갱신 시 전세대출 한도를 임대차보증금 증액 범위 내로 제한할 예정이다. 증액금액이나 총임차보증금의 80%에서 기존에 취급된 전세대출을 뺀 금액 중 낮은 금액으로 한도를 결정한다. 아울러 신용대출 마이너스통장 한도도 최대 1억5000만원에서 5000만원으로 줄였다.
이밖에 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은 주택담보대출 모기지보험(MCI·MCG) 가입을 중단했다. 지난달 26일 신한은행을 시작으로 국민은행도 29일부터 이를 중단했다. 우리은행은 다음 달 2일부터, 하나은행은 다음 달 3일부터 중단할 예정이다. NH농협은행은 6월 26일부터 MCI 발급을 중단했다.
MCI·MCG는 주택담보대출 시 가입하는 보험으로 이 보험이 없으면 소액 임차보증금을 제외한 금액만 대출이 가능하다. 사실상 대출 한도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 29일 기준 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은 724조617억원으로. 지난 7월 말보다 8조3234억원 늘었다. 2021년 4월(9조2266억원) 이래 3년 4개월 만에 최대치다. 특히 전세대출은 118조7179억원으로 같은 기간 938억원 증가해 지난 5월부터 4개월 연속 오름세다.
전세대출이 늘어나는 이유는 전세값 상승과 연관이 있다. 부동산 빅데이터 업체 아실에 따르면 지난 1일 기준 서울 아파트 전세 매물은 2만6740개로 1월 1일(3만4822개) 대비 30% 줄었다. 여기에 전세사기 사건 등으로 인한 ‘빌라 기피 현상’과 지난 7월부터는 임대차2법 4년 만기 시기가 겹치면서 아파트 전세 매물이 더욱 없어졌다.
전세값이 상승하자 전세를 끼고 투자하는 형태의 갭투자도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차규근 조국혁신당 의원실이 지난 1일 국토교통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7월 서울에서 갭투자로 의심되는 경우인 ‘임대목적으로 보증금을 승계하고 금융기관 대출까지 받아 주택을 구매한 건수’는 963건·1조3000억원으로, 전년 동기(334건·4400억원) 대비 약 2.8배 급증했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전세대출을 조일 경우 서민들의 주거 사다리가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라 며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세대출을 이용하는 계층이 대부분 무주택이거나 실수요자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이 같은 조치들로 가계대출을 잡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수도권 주택공급 부족으로 실수요자들의 주택 매수 심리도 커지고 있다는 이유다.
금융권 관계자는 “집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대출을 제한해도 무주택자 수요가 커지고 있기 때문에 가계대출이 줄어들 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또 “현재 은행별로 대출 제한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소비자 혼란이 커질 수 있으므로 은행별 대출 제한 간극이 벌어지지 않도록 통일된 정책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