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야스키, ‘투혼’ 없이는 전설도 없다

김종수 객원기자 (asda@dailian.co.kr)
입력 2008.12.18 15:06
수정

´투혼(鬪魂)!´

끝까지 투쟁하려는 기백,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강렬한 근성 등을 뜻하는 이 말은 스포츠에서 특히 많이 쓰인다. 파워와 테크닉이 육체적인 요소라면 투혼은 정신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많은 팬들은 선수를 평가할 때 눈에 보이는 것 외에도 열정이나 투혼을 높이 산다. 즉, 단순히 잘하기만 해서는 팬들을 감동시키기 어렵다.

이는 세계 최고의 입식 격투 단체인 K-1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격투 스포츠라는 특성상 더욱 강조될 수도 있는 부분. 이를 입증하듯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쟁쟁한 전설들은 하나같이 ‘투혼’을 불살랐다.



안정적, 하지만 열광시키지 못하는 스타일

´플라잉 잰틀맨´ 레미 본야스키(32·네덜란드)는 지난 파이널에서 정상에 오르며 통산 3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이는 4회 우승의 후스트에 이어 피터 아츠-세미 슐트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기록으로 적어도 기량 면에서는 더 이상 본야스키에게 이의를 달기 힘들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팬들은 본야스키에게 ´전설´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지 않는다. 잘하기는 하지만 캐릭터 면에서 2%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는 K-1 역사상 유례가 없는 막강한 수비력의 소유자다.

체형 등 겉모습만 봤을 때는 스피드를 살린 화려한 스텝으로 경기를 풀어나갈 것 같지만, 의외로 굉장한 내구력을 바탕으로 한 가드 게임을 즐긴다. 워낙 복부와 하체의 내구력이 좋아 큰 글러브로 작은 머리만 단단하게 커버하고 있으면 상대는 찌를 곳이 없다. 때문에 경기가 진행될수록 흐름은 본야스키 쪽으로 쏠리기 십상이다.

그는 모험을 즐기지 않는다. 일단 강력한 가드로 상대공격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놓는 가운데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잔 공격을 통해 포인트 및 데미지를 쌓아나간다. 그러다가 빈틈이 발견되면 벼락같이 치고 들어가 분위기를 완전히 장악해버린다. 이미 충격을 받은 상대 입장에서는 순식간에 이뤄지는 폭발적인 러시를 감당해내기 쉽지 않다.

어찌 보면 이러한 패턴은 본야스키가 아니면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파이팅 스타일이다. 하지만 짧은 라운드 동안 화끈한 플레이를 원하는 K-1 팬들 사이에서는 조금은 아쉽다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본야스키의 이런 운영형 파이팅은 하루에 몇 경기를 치러야하는 그랑프리 시스템에서 톡톡히 위력을 발했다. 다음 경기를 생각해야하는 특성상 데미지를 최소화하는 선수가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3회 우승의 챔피언, 그러나 부족한 존재감

본야스키는 3번의 우승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우승을 하는 과정이 썩 매끄럽지 못했다. 2연속 챔피언 등극 당시에는 결승전 상대가 최약체 중 하나인 무사시(36·일본)였으며, 이번 파이널에서는 ´악동´ 바다 하리(24·모로코)와 불미스런 사건 속에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며 우승을 차지했다.

물론 본야스키는 잘못이 없다. 무사시가 연속해서 결승에 오른 배경에는 주최 측의 자국 선수 밀어주기가 영향을 끼쳤으며 이번 파이널에서의 난동사건은 100% 하리의 잘못이다. 하지만 과거 피터 아츠가 그랬듯 모두를 열광케 하며 우승을 거머쥐는 명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은 ´옥에 티´라고 할 수 있다.

원년 챔피언으로 유명한 브랑코 시가틱(54·크로아티아)은 비록 K-1에서 이룬 업적은 크지 않지만 강력한 펀치를 무기로 역사에 남는 파이널 시리즈를 만들어내며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우승할 당시의 시가틱은 누가 봐도 흥분할 만큼 명승부를 계속 연출했기 때문이다.

만약 본야스키가 하리에게 반칙승을 얻어내지 않고 기어코 일어나서 승부를 끌고 갔다면, 우승 여하를 떠나 팬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반칙을 당하기 이전까지 본야스키가 경기를 유리하게 끌고 간 것도 맞고 실질적인 기량에서도 아직은 하리보다 앞선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지만, 상당수 팬들은 파이널무대에 걸맞은 챔피언의 투혼을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앞서 거론한 것처럼 K-1은 짧은 라운드 시스템을 가져가는 대신 최대한 화끈한 승부를 권장하고 있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길지 않은 시간동안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내려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드라마 같은 명승부들이 속출했다.

특히 ´낭만의 시대´ 주인공들로 유명한 피터 아츠(38·네덜란드)-마이크 베르나르도(39·남아프리카공화국)-어네스트 후스트(43·네덜란드)-앤디 훅(사망)으로 이어지는 ´4대천왕´은 지금까지도 팬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다. 여기에는 기량 못지않게 팬들을 울리고 웃겼던 그들만의 ´투혼´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된다.

기량 하나 만큼은 최고인 극강의 세미 슐트(35·네덜란드)가 인기가 없는 데는 ´스토리는 만들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스토리를 잡아먹는´ 어쩔 수 없는(?) 그만의 캐릭터가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

반대로 제롬 르 밴너(36·프랑스)는 우승은 한 번도 차지하지 못했지만 가장 K-1에 어울리는 파이팅을 통해 ´무관의 제왕´이라는 닉네임과 함께 팬들의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다.

본야스키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가장 과정이 좋지 않았던 파이널 우승자가 되고 말았다. 어쩌면 스토리가 빈약한 그의 격투인생에서 바로 지난 하리사건이 가장 유명한 드라마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불운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좀 더 강력한 이미지 구축이 필요한 본야스키다.[데일리안 = 김종수 기자]

김종수 기자 (asda@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관련기사

김종수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