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법망의 그물코 넓힐 수 있을까?
입력 2024.05.01 07:07
수정 2024.05.02 07:00
대통령제 권력구조 성공의 조건
정당의 중앙당 중심체제 해체해야
대화라면서 최후통첩성 발언까지
한국 정치가 정치세력간의 사생결단식 무한정쟁의 구덩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대통령 중심제 권력구조와 중앙집권형 정당제도의 미스매치라고 본다. 권력분립제도는 국가권력의 3축이 서로 견제와 균형 속에 민주적 조화를 이룬다는 믿음과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미국의 건국 지도자들이 가깝게는 존 로크, 몽테스키외의 권력분립론, 멀리는 로마 공화정의 예에서 배워 제도화한 결과였다.
대통령제 권력구조 성공의 조건
미국의 대통령제가 중단 없이 꾸준히 이어지자 신생 독립국 정치리더들이 이를 자신들의 나라에 이식했다. ▲전통적 국가체계는 주로 원톱의 군주제였다. ▲건국 초기에는 강력한 리더십이 소망스러웠다. ▲국가건설을 주도한 세력은 권력을 독점하길 원했다. ▲대통령이 군주의 이미지를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선출직이라는 단서가 붙었다. 정당화의 명분으로 부족하지 않았다. ▲대의원들이 통치집단으로서 신뢰를 쌓기는 시간이 부족했다.
아마 이런 심리상태를 배경으로 신생국들은 쉽게 미국식 대통령제를 흉내 냈을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이라는 지위와 직책만 모방했을 뿐 권력 작용의 내용은 대부분 딴판이 되고 말았다. 통치권을 쥔 측이 독재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생각된다. 많은 나라에서 ‘권력’이 최고의 쟁취목표가 됐다. 정권찬탈 국가정복이 가치와 질서의 바탕이던 시대에로 정치의식이 퇴화했고 쿠데타에 의한 정권교체가 일상화했다.
미국은 통치제도가 먼저 확립되고 대통령이 들어선 후에야 정당정치가 성립됐다. 물론 독립혁명과 국가건설 과정에 연방파와 반연방파가 대립 경쟁하는 구조가 형성됐으나 이들은 직접적으로 집권경쟁을 벌이는 관계는 아니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고별사에서 정당의 위험성을 각별히 강조하기까지 했다.
바로 정당들이 성립되긴 했지만 그것이 3권 분립의 기본 구조를 흔드는 선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미국이 연방제국가, 그러니까 각주의 독립성이 유지되는 정치체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어쨌든 전국적으로 지휘체계가 확립·강화된 그런 정당은 오늘날 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어떤 조직, 어떤 단계에서든 분권이 민주원칙으로 중시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에 반해 미국 대통령제 모방국가들은 정치적 명망가나 실력자가 강력한 정치세력을 이끌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에 대한 도전세력 역시 같은 형태의 정치세력을 거느렸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명망가나 유력자들에 의해 전국적 조직체계를 갖춘 정당들이 먼저 생겨난 것이다. 특히 민주공화당은 2원적 체계를 갖췄다. 구소련 공산당의 조직 원리에서 배웠음직하다. 당 기구를 집행기관과 의결기관으로 2원화하고 집행기관은 당 총재로부터 지구당 사무국에 이르는 수직적 명령계통을 갖췄다. 의결기관은 그 이름에도 불구하고 당료집단인 집행기관의 지배하에 놓였다.
정당의 중앙당 중심체제 해체해야
정치민주화 이후 정당도 변화를 거듭했지만 중앙당 중심체제라는 기본 골격은 그대로다. 정당의 운영권, 선출공직 후보 공천권을 장악하고 있는 중앙당은 당의 전국 조직과 소속 의원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한다. 그 바람에 3권 분립 체제가 잠식당하는 상황이 노출되고 있다. 입법권을 입법부와 거대정당이 분점하는 형태의 의정구조가 생겨난 것이다. 그것조차도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거대정당 대표가 입법권에서 파생되는 정치권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한다.
집권당이 제1야당보다 의석을 더 차지할 경우 그나마 권력투쟁이 완화되지만 야당이 다수당, 더 심하게 지금처럼 거대한 정당이 되면 대통령과 야당대표의 직접적인 권력쟁탈전이공공연하게 벌어진다. 대통령은 레임덕(lame duck) 정도가 아니라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가 말한 바 데드덕(dead duck) 신세가 되고 만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그간 여덟 번이나 여야 영수회담을 애걸하다시피 했다가 이번엔 초청을 받아 대통령과 만나게 된 사건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바가 공수 양측의 입장 전환이다.
윤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민주당은 영수회담 의제라는 것을 거창하게 만들어 대통령실을 압박했다. 민주당이 두 번이나 의제를 관철시키는데 실패하자 영수회담이 물 건너가는 게 아니냐는 전망까지 나왔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26일) 민주당 이 대표가 한 마디 툭 던졌다.
“다 접어두고 만나겠다.”
대화 상대를 속 좁은 방어적 대통령으로, 자신은 호방한 정치리더로 이미지 짓는 한방이었다. 아마도 진작 구상된 수순이었을 것이다. 권력의 추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도 이 말 한 마디로 보여주게 될 것이라고 계산했을 법하다. ‘말 잘하는 이재명’으로 호가 났으니까.
“박근혜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했더니 정말 존경하는 줄 알더라”고 했던 그 이 대표다. 다 ‘접어둘’ 리가 없다. 의제로 정해지든 말든 중요한 것은 자신이 윤 대통령에게 무슨 말을 하고,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다. 그는 할 말을 이미 다 준비하고 있었다. 초청 당사자가 말을 막기야 하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이 대표는 10여건의 의제가 담긴 A4용지 10페이지 분량의 문건을 꺼내 15분 동안 읽어 내려갔다. 의제로 받아주지 않았다고 해서 꺼내지 않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걸 읽어야 자신이 얼마나 민생의 회복과 안정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리더인 지를 국민이 알도록 할 것 아닌가. 반대로 윤 대통령은 민생과 민심을 모르는 통치자가 되는 것이고.
말을 격하게는 못하지만 뼈 있게는 해야겠다는 생각은 한 인상이었다. 그래야 효과적으로 뜻이 (윤 대통령이 아닌) 유권자에게 전달되고 자신의 유쾌하지 못했던 기억에도 위안이 될 것으로 여겼음직하다.
대화라면서 최후통첩성 발언까지
“오다 보니까 한 20분 정도 걸리는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
“사실 지난 2년은 정치는 실종되고 지배와 통치만 있었다는 그런 평가가 많다.”
“행정 권력으로 국회와 야당을 혹여라도 굴복시키려 하시면 성공적인 국정은 쉽지가 않을 것이다.”
“우리 국민이 혹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잡혀가는 거 아닐까 이런 걱정들을 하는 세상이 됐다. 모범적인 민주 국가로 평가받던 우리 대한민국에 대해 스웨덴 연구기관이 독재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어떤 것들을 지표로 삼았는지, 어떤 기관의 연구결과인지는 말을 않고─. 이런 류의 연구 결과는 수십 건이라도 찾아내거나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 역시 말재간인가?)
“이번 기회에 국정 운영에 큰 부담이 되고 있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면 좋겠다.” (김건희 여사 문제를 두고 한 말이겠는데, 김혜경 씨의 법인카드 유·남용 의혹을 한사코 부인하는 처지로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바로 후흑<厚黑>정치의 특징이겠다)
조롱과 독설을 오가는 이런 화법은 서로의 처지가 바뀌고 있음을 절감하라는 뜻으로 들릴만했다.
“국정의 방향타를 돌릴 마지막 기회라는 그런 마음으로 우리 국민들의 말씀에 귀 기울여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최후통첩 같이 들리는 이 말을 그는 윤 대통령 면전에서 내놨다. 선거란 이런 것, 패장은 할 말이 없는 법이다.
그렇지만 우리 정치제도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계기로 삼는 게 더 중요하다. 특히 정당의 중앙당이 거대한 권력기관화하고 그 것이 입법부를 장악해 대통령과 맞서는 무한 권력투쟁의 시대는 끝내야 한다. 정당의 체제를 바꾸든지, 그걸 못하겠다면 대통령중심제를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제로 돌리든지─.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 따위 상황을 악화시킬 꾀는 더 내지 마시라. 국회의원 중대선거구제 전환으로 해결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표의 등가성 요구라면 대선 표의 등가성을 같이 말해야 옳다.
그건 그렇고─. 이 대표 사법리스크를 해소할 자신이 생긴 건가? 총선의 압도적 승리와 확고한 ‘이재명의 민주당’화를 통해 여론이라는 보호막이 훨씬 두꺼워졌다. 사법부와 검찰이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미래권력으로 유력시 되는 상대를 눈 똑바로 뜨고 “법대로!”를 외치긴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 변화에 편승해 혁신당 조 대표까지 이 대표의 팔을 붙잡고 데리고 가 달라고 매달리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아무려면 대한민국의 사법부와 검찰이 이들의 위세에 눌려(시쳇말로 쫄아서) 법망의 그물코를 늘려주기야 하겠는가. 법치국가 존립의 반석들인데!
글/ 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