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인터뷰] 차지연 “12년 함께 한 ‘서편제’, 아름다운 작별 중”
입력 2022.09.12 08:43
수정 2022.09.12 08:43
2010년 초연부터 다섯 시즌 동안 '송화'로 출연
"'서편제', 눈부시게 찬란하고 아름다운 내 청춘"
"내 목표는 '스타' 아닌 오랫동안 연기하는 배우"
"깨끗한 무대 만들고 싶어, 나부터라도 노력"
“처음 ‘서편제’를 했을 때가 29살이었어요. 25명 남짓의 관객을 모시고 했던 그 때의 공연을 절대 잊을 수 없어요. 그래서인지 맑고 깨끗한 ‘송화’를 조금도 오염시켜서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뮤지컬 배우 차지연은 12년 전인 지난 2010년 8월,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초연한 ‘서편제’에서 ‘송화’를 처음 만났다. 그리고 2012년, 2014년, 2017년에도 같은 역할로 무대에 올랐고 올해는 다섯 번째 송화를 연기하는 시즌이면서, 동시에 오랜 기간 함께 한 송화를 보내주는 시즌이기도 하다.
"29살에 처음만난 송화, 이젠 보내줘야 할 때"
‘서편제’는 이청준 작가의 동명 소설과 이를 바탕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로 잘 알려진 작품이다. 뮤지컬로 다시 만들어진 이 작품은 이지나 연출, 조광화 작가, 윤일상 작곡가 등 내로라하는 창작진이 참여하면서 주목을 받아왔다. 대중적으로 익숙한 작품이지만 차지연에게는 ‘서편제’가 하나의 도전이었다.
“판소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 당시엔 두려움으로 다가왔어요. 특히 제가 진짜 소리하는 사람은 아니다 보니 ‘심청가’에 부담이 컸죠. 전문가들이 보셨을 때 ‘너무 아니다’라고 하지 않을 정도로 정말 열심히 했어요. 다 쏟아내는 것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유일한 내 무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굉장히 많이 울기도 했고요. 그럼에도 나름대로의 거칠고 정돈되어 있지 않은 투박한 날 것의 느낌이었던 것 같아서 그때의 송화가 저에겐 굉장히 소중해요.”
첫 공연 당시 25명에 불과했던 관객은 이제 1000석 규모의 광림아트센터 BBCH홀을 가득 채우고 있고, 20대였던 차지연은 이제 40대 초반의 나이로 한 남편의 아내(그리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됐다. 차지연이 이런 변화를 모두 겪어낼 수 있었던 건, 그의 작품에 대한 진심이 관객들에게 닿았기 때문이다.
“환경이 바뀌고 새로운 삶들을 경험하면서 송화가 더 맑아진 것 같기도 해요. 조금 더 묵직하고 담백해지기도 했고요. 그게 제가 바랐던 송화의 방향이었어요. 사실 마지막이라고 해서 허전하거나 섭섭함은 없어요. 여기까지가 딱 아름다운 만남이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배우의 덕목 중 하나는 사랑하는 역할과 작품을 보내줘야 할 시기를 잘 알고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송화와의 이별을 예감하던 차에 ‘서편제’도 대장정을 마무리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는데 ‘너(작품)와 내가 같은 시기에 멋있게 헤어질 수 있겠구나’ 싶었죠.”
그럼에도 차지연은 연기를 끝내고 커튼콜에서 매번 눈물을 보인다. 이 눈물은 초연 당시 흘렸던 눈물과는 분명 질감이 다르다. 그는 ‘아쉽지 않다’고 했지만 이 눈물에는 분명 송화와의 이별에 대한 감정도 섞여 있을 것이다.
“이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 자체가 너무 감사해요. 사실 이번 공연을 시작할 때 ‘너무 울지 말자’라고 스스로 목표를 세웠는데 상상치도 못한 호응과 함성, 박수소리를 듣자마자 무너졌어요. 지금도 관객들의 반응을 생각하니까 털이 서요(웃음). 빼곡하게 채워진 객석을 보면 ‘좋은 배우로 늙어가고 싶다’는 저의 목표에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진심을 알아봐 주시는 분들, 내 편이 생긴 것 같이 든든하죠.”
차지연은 국악 전공자는 아니지만, 국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다. 외조부가 판소리 명인 송원 박오용(1926~1991)이다. 외조부의 피를 물려받아 어릴 때부터 고수로 재능을 보였다. 그가 원치 않았더라도 그가 자라온 환경엔 늘 국악이 있었다. 차지연은 “너무 어린 나이에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어 국악에 좋은 기억이 없다”면서도 “다만 ‘서편제’의 주제인 ‘한’을 쌓아준 것 같아 그게 무대에서 역할로 승화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송화가 판소리 ‘심청가’ 대목을 부르는 마지막 장면은 작품의 백미다.
“아무래도 소리에도 경험이 쌓였나 봐요. 다섯 시즌을 하고 나니까 소리를 하는 건 요령이 조금 생겼는지 목이 상하진 않아요. 제가 노래할 때 소리 길이랑 소리할 때 길이랑 정확하게 구분이 되더라고요. ‘서편제’에서는 오히려 소리할 때가 가장 편해요. 그래서 제일 긴장하는 곡이 ‘살다보면’이기도 하고요. 이런 긴장감은 나태해지거나 타협하지 않는, 나 자신을 과신해서 잘못된 길로 가는 배우는 아니란 걸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해서 스스로에게 뿌듯하고 감사해요.”
"뮤지컬 배우로 묵묵히 걸어왔던 삶, '송화'와 비슷하죠"
2006년 뮤지컬 ‘라이온 킹’ 앙상블로 데뷔해 올해 16년차를 맞은 차지연의 길은, 극중 송화가 소리를 찾아 떠나온 여정과 매우 닮아 있다. 인내하고 참으면서 마침내 자신이 찾던 길을 걷게 되는 모습이 그렇다.
“누군가는 제게 ‘너는 왜 안 되는 작은 작품만 골라서 하냐’ ‘그렇게 하면 스타가 될 수 없다’ ‘배우로서 성공할 수 없는 멍청한 길을 가려고 하냐’고 했어요. 마음이 혼란스럽기도 하고 속상했지만 제가 원하는 건 ‘스타’가 아니었어요. 오랫동안 연기할 수 있는 배우였죠. 끊임 없이 나를 단련하면서 묵묵히 제 길을 걸어왔던 것 같아요. 여러 차례 깨지고 비판을 들으면서 성장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살아있음을 느껴요.”
최근에는 무대 연기는 물론 드라마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있는 차지연이지만, 올해 무대를 그만 둬야 하나 고민할 정도의 회의감에 맞닥뜨렸다고 고백했다. 얼마 전 뮤지컬계를 뒤흔든 인맥 캐스팅 논란도 그 이유 중에 하나다. 차지연은 논란이 불거진 당시 SNS를 개설하고 뮤지컬 제작환경 변화를 요구하는 배우들의 성명에 동참하기도 했다.
“배우는 삶과 생각이 그대로 무대에 투영된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흐를수록 무대가 무서운 공간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죠. 그래서 평소에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사실 맨땅에 헤딩하면서 수많은 사건과 상황을 겪었고 수모도 많이 당했어요. 그런 불공정한 상황을 지켜봐오면서 서로 욕을 하고 험담을 하면서 이곳(뮤지컬계)을 시궁창으로 만드는지 굉장히 속상했어요. 건강하고 깨끗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 나부터라도 그런 방향으로 살아보자는 마음이 더 강하게 들더라고요.”
그가 회의감에 빠져있을 때, 중심을 잡아준 건 남편인 배우 윤은채다. 차지연은 “(남편은)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고 저에겐 정말 큰 존재”라며 “내 인생에서 남편은 너무 큰 축복”이라고 말했다.
“이지나 선생님이 저보고 ‘외강내유유유유’라고 말하시더라고요. 그만큼 겁도 많고 정서적으로 단단하지 못해요. 그런 저를 항상 차분하고 따뜻하게 잡아주고, 이 자리에 잘 서있을 수 있도록 제 손을 잡아주는 것이 남편이에요. 이번에 무대를 그만둬야 하는지 고민할 때도 남편이 잘 이끌어줬고,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그런 선한 모습은 무대에서도 온기로 느껴지죠. 남편이지만 배우로서도 그를 좋아하는 이유에요.”
마지막으로 차지연은 ‘서편제’를 떠내보내는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는 “‘서편제’는 눈부시게 찬란하고 아름다운 내 청춘”이라면서 “화려함은 없지만, 그 어떤 작품보다도 묵직하게 마음속에 남았으면 한다. 인물 한 명 한 명의 삶이 다양한 색채로 펼쳐지는 그 풍성함을 기억해줬으면 한다”고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