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명대사㉒] Dr.폴이 안경을 벗는 이유(인 트리트먼트)
입력 2022.04.07 11:02
수정 2022.04.14 07:22
소피: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하시네요
폴: 주변 사람들이 사랑한다고 안 하니?
소피: 아빠요
폴: 아버지가 해 주셔?
소피: 할 필요 없어요
폴: (소피 네가 입원해서) 병문안 갔는데 아버지가 안 계셔서 놀랐다
소피: 못 만난 거예요
폴: 아버지는 네 사랑을 어떻게 얻으셨니?
소피: 왜요?
폴: 비결을 훔쳐다가 어머니한테 드리게
소피: 웃기네요
폴: 말하지도 않는데 사랑한단 걸 어떻게 알아?
소피: 말할 필요 없어요. 말이 뭐라고요, 다들 거짓말만 하는데.
사랑이 느껴져요. 아빠도 나를 느끼죠. 떨어져 있을 때도요.
폴: 비밀 하나 알려 줄까? 난 사실 안경을 써야 한단다. 근데 보이지 않는 채로 살지. 왜인 줄 아니?
소피: 왜요?
폴: 그편이 좋거든. 안경을 쓰면 모든 것이 선명해. 안경을 벗으면 다들 피부도 완벽해 보이지.
소피: 우리 엄마도 슈퍼 모델처럼 보이겠네요. 그 말 왜 했어요?
폴: 아버지는 멀리 있어서 좋아 보일 수 있어. 먼 곳에 있으니 뿌옇게 보이지. 하지만 어머니는 코앞에 있으니까 끔찍이도 선명하고.
소피: 이 대화 진짜 지겨워요.
폴: 의식을 잃기 전에 모델 이야기를 했잖니. 사진 촬영이 제때 시작하지 않았다면서. 아버지가 사진가라고 했던 게 기억나는데. 아버지가 모델들이랑 일하시니?
소피: 왜 자꾸 아빠를 들먹여요? 아빠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요. 이거 하나 못 알아들어요?
OTT(Over The Top, 인터넷TV) 웨이브에서 볼 수 있는 미국 HBO 드라마 ‘인 트리트먼트’의 대사다. 시즌4까지 나온 ‘인 트리트먼’ 가운데 시즌1 23화 내용으로, 지난 2008년 현지에서 방송됐다.
‘인트리트먼트’(In Treatment)는 정신과 의사 폴이 운영하는 상담소를 중심으로, 내원하는 환자들과 폴이 나누는 대화가 주다. 상담소를 벗어나기도 하고 야외 장면도 있지만, 주로 서재에 차려진 응접실 소파에 앉아서만 대화하는데 조금도 답답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자막의 표현을 빌리면 ‘내담자’의 사연이 흥미진진하고, 줄곧 듣다가 ‘상담가’인 폴이 한마디씩 건네는 얘기가 귀 기울이게 하는 터라 ‘벌써 끝인가’ 아쉬울 정도다. 회당 러닝타임이 25분 정도인 것도 회차를 이어 시청하는데 부담을 던다.
웨이브에 시즌3까지 공개돼 있고 시즌1이 43화, 시즌2가 35화, 시즌3이 28화로 총 100화가 넘어도 부담 없이 시작해도 되는 이유가 또 있다. 회차마다 ‘소피 3주차’와 같이 내담자의 이름과 상담 회차가 안내돼 있기에, 순서대로 전부를 시청하지 않아도 관심이 가는 인물의 이야기만을 따라갈 수도 있다. 또 이야기 전개 형식이 폴과 내담자의 상담만 있는 게 아니고, 상담자인 폴이 내담자가 되어 또 다른 선배 상담가를 찾아가는 방식도 있어 다채롭다. 폴의 가정사가 드러나고, 상담가가 내담자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서로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가도 알 수 있다.
화려한 액션이나 볼거리와 겨뤄도 뒤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작품 전체를 이끄는 폴이라는 캐릭터와 그를 연기한 배우 가브리엘 번의 매력이 출중한 게 첫 번째다. 두 번째는 남녀노소,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가브리엘 번과 팽팽한 2인극(때로 3인극) 무대를 펼치는 내담자 역 배우들의 연기력이다. 대부분 마주 앉아, 삼각형 대형으로 앉아 대화만을 주고받는데 캐릭터 몰입도가 보통이 아니어서 우리를 상담소 한쪽에 숨죽이고 앉아 있게 만든다.
인생 위기에 처한 사람들과 정신과 의사의 심리상담, 인생 상담인 만큼 명대사는 말할 수 없이 많이 나온다. 인생이라는 것이 카트 게임 할 때 계속해서 날아오는 장해물처럼 계속해서 달려드는 위기들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 가운데 위기 해결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고려하면 메모해둘 만한 대사가 정말 많다.
서두에 옮겨 적은 대화는 ‘소피 4주차’의 일부다. 소피(미아 바시코프스카 분)는 열여섯 살 체조선수다. 아빠를 무척 따랐는데 사진작가인 어느 날 아빠는 모델과 떠났다. 소피는 엄마와 남았고, 엄마는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소피는 엄마가 밉고 아빠가 그립다. 소피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는데, 다른 사람들은 소피가 차로 뛰어들었다고 여긴다. 자신에게 극단적 선택의 경향이 없다는 소견서를 받아 올림픽 예선전에 참가하고 싶어 소피는 폴의 상담소를 찾게 됐다.
처음엔 교통사고가 소피의 선택이었는지 아닌지, 소피에게 자신을 해하려는 마음의 병이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문제로 보인다. 하지만 상담이 거듭될수록 소피가 왜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로 몰고, 그 결과 ‘극단적으로’ 자신을 벌하려는 성향을 지니게 됐는가에 주목하게 한다.
소피는 일곱 살 무렵 예정에 없던 이른 하교로 일찍 귀가하게 됐고, 아빠의 외도 장면을 목격했다. 소피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어린아이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비밀이 생겼는데. 자신이 아빠에게 아는 체하지 않고, 엄마에게도 말하지 않은 게 멀어져 가는 부부 사이를 키워 부모가 이혼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소피가 아이돌보미를 한 체조 코치 부부의 가정도 자신이 망쳤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베이비시터를 하러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은 날, 소피는 “내가 다 망쳤어” 자신을 책망하며 도로로 뛰어들었다.
외도한 아빠의 잘못이고, 어려운 상황이지만 어린 소피를 든든히 지켜주지 못하고 자기 슬픔에 빠진 엄마의 잘못이고, 어린 소피에게 아이를 부탁하고 6개월 장거리 출장을 간 코치 부인의 잘못이고, 부인의 부재를 틈타 미성년 제자에게 어른으로서 코치로서 절대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넘은 남편의 잘못이다. 모두 어른의 잘못이다. 그런데 어른들이 발뺌할 때 소피는 모두 ‘내 잘못’으로, 가정을 망치는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반발을 멀리 있는 아빠, 남일 수밖에 없는 코치 부부가 아니라 함께 사는 엄마에게 퍼붓고 있다.
폴 박사는 소피가 아빠에 대해서는 거짓말(병원에 오지 않은 건 기본,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것조차 모르지만 병원에 왔는데 폴이 못 본 거라고)을 해서라도 방어하는 것을 넘어 험담조차 입에 올리지 못하는 것에 주목한다. 일곱 살 이래 어깨에 놓여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 위해서는 아빠와의 솔직한 대화, 관계 회복이 중요하다고 진단한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안경 비유’가 나왔다. 극 중에서는 멀리 있는 아빠는 안경을 벗고 본 피사체처럼 뿌옇게 보여 대략 다 좋아 보이고, 코앞의 엄마는 지독하게 자잘한 것들까지 선명하게 보여 전부가 미워 보이는 상황에 비유했다. 너무나 적절해서 무릎을 쳤다.
더욱 공감한 건 우리의 인생에도 적용되는 말이어서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표현이 일상화됐다. 음식점에서 한 자리 띄어 앉는 것을 두고도 ‘맛있는 거리’라 칭한다. 개인적으로, 20년 전부터 ‘아름다운 거리’라는 말을 종종 써왔다. 애인이나 부부 관계는 물론이고 목숨을 내줘도 아깝지 않은 자식과의 사이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말도 아니고, 심리적으로 좀 데면데면 너무 뜨겁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존중의 거리’이다. 제아무리 내가 사랑하는 이든 내 모든 것을 다해 키운 자식이어도 결코,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 지나치게 깊이 관여하고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시간이 흐르고도 그 상대와 가까이 지내고 싶다면,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면, 헤어지고 싶지 않다면 ‘아름다운 거리’를 지켜야 관계가 아름다워진다.
폴 박사의 조언과 반대로 들릴 수 있지만 같은 말이다. 소피의 아빠는 딸과의 ‘아름다운 거리’ 두기에 실패했고 아이의 보금자리인 집에서 위험한 행각을 벌여 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소피는 엄마와의 ‘아름다운 거리’ 지키기를 거부하고 일일이 낱낱이 공격하고 반응했다. 드라마 속에나 나올 일이 아니다.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점검해 보자, ‘아름다운 거리’를 지키고 있는지. 필요 이상으로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쓸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