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초점] “10년 전 배우가 그대로”…뮤지컬계, 캐스팅 답보상태 왜 계속될까
입력 2021.10.21 14:09
수정 2021.10.21 14:09
멀티캐스팅·아이돌 캐스팅, 신인·조연배우들 기회 감소로
"뮤지컬 팬들도 등 돌리는 식상한 캐스팅 문제"
“뮤지컬 캐스팅 보드를 보세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어요.”
앙상블로만 수년간 무대에 선 한 뮤지컬 배우는 뮤지컬계의 캐스팅에 “신인이 설 자리, 앙상블이 올라갈 자리는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뮤지컬에서 한 배우가 동시에 여러 작품에 출연하거나, 계속해서 비슷한 배우들이 작품을 점유하는 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 문제를 논하기 위해선 한국 뮤지컬계에만 존재하는 ‘멀티캐스팅’ 시스템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국내 뮤지컬계에는 더블캐스팅을 넘어 트리플, 쿼드러플 캐스팅, 심지어는 한 배역에 무려 6명의 배우를 캐스팅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배우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배우들에게 체력 안배 시간을 준다는 점 등 멀티캐스팅에도 장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뮤지컬계가 작품 중심 체제가 아닌, 배우 중심 체제로 변하면서 제작사는 자연스럽게 ‘티켓파워’가 있는 톱배우를 비롯해 아이돌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작품의 선택 기준이 배우로 점철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아이돌의 등장이 뮤지컬계 대중화에 일정 부분 기여한 점은 무시할 수 없다. 또 이제는 ‘가수’보단 ‘뮤지컬 배우’라는 호칭이 더 잘 어울리는 김준수나 옥주현과 같은 걸출한 실력자들을 찾아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아이돌을 고용함으로써 신인이 데뷔할 수 있는 루트가 감소하는 부작용도 동반한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조연과 앙상블 배우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줄어들게 된다.
뮤지컬 팬들도 이런 문제가 뮤지컬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우려했다. 대표적으로 지난 2018년 ‘엘리자벳’ 죽음 역 캐스팅 당시 박형식, 정택운(빅스 레오) 그리고 추가캐스팅으로 김준수가 캐스팅되면서 논란이 일었던 것이 그 예다. 정통 뮤지컬 배우가 아닌, 아이돌로만 캐스팅을 하면서 실력 있는 배우들이 설 자리가 사라졌다는 이유에서다.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 메인과 얼터, 언더스터디가 존재하는 것처럼, 국내에서도 이런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긴 하다. 다만 멀티캐스팅이 당연시되면서 얼터의 개념은 사실상 사라진지 오래다. 얼터는(Alternate, 얼터네이트) 주연배우의 배역을 소수 회차 나눠 공연하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한 주에 10회 공연이 있다면, 8회는 주연 배우가 서고 나머지 2회를 얼터가 서는 식이다.
국내에서도 얼터로 무대에 섰다가 지금 이른바 ‘대배우’가 된 스타들이 다수 존재한다. 현재 ‘명성황후’ ‘마리 앙투아네트’ ‘팬텀’ ‘모차르트!’ ‘엘리자벳’ 등 대극장 주연 자리를 꿰차고 있는 배우 김소현의 경우 데뷔작인 ‘오페라의 유령’(2001) 크리스틴 역에 얼터 배우로 참여했다. 주 2~3회 올라 관객들의 큰 호응을 받아 차츰 비중이 커지고, 나중에는 더블캐스팅으로 공연했다.
또 ‘모차르트!’(2010) 초연 당시 언더스터디였던 박은태는 주연 배우의 부상으로 단 7회의 공연에 오르면서, 평단과 관객의 극찬을 받으며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후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엘리자벳’ ‘프랑켄슈타인’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팬텀’ ‘킹키부츠’ ‘스위니 토드’ ‘지킬 앤 하이드’ 등에 연이어 주인공으로 서면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대배우’가 됐다.
이밖에도 김우형은 지난 2006년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에서 조승우와 류정한의 언더로, 같은 해 홍광호는 ‘미스사이공’의 주인공 마이클 리의 언더로 출연했고 또 김선아, 최재림, 류정한 등 많은 스타들이 얼터나 언더로 무대에 섰다가 현재 내로라하는 작품의 주연 배우 자리에 섰다.
하지만 지금 공연계에서 이 같은 스타가 또 나올 수 있을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지금도 몇몇 제작사의 경우 얼터와 언더 시스템을 고수하고 있고, 신인 배우 발굴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올해 EMK뮤지컬컴퍼니는 ‘팬텀’ 크리스틴 역에 김소현, 임선혜, 이지혜를 캐스팅하는 동시에 신인 배우 김수까지 합류시키면서 주목을 받았다. 첫 작품으로 평단의 극찬을 받은 김수는 올해 12월 공연되는 뮤지컬 ‘잭 더 리퍼’의 여주인공 글로리아 역에도 이름을 올린 상태다.
하지만 대다수의 공연은 여전히 스타마케팅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메인을 대신해 무대에 서는 것조차 하늘의 별 따기인 현 시스템 내에선 이들과 같은 뮤지컬 스타가 탄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결국 이 시스템 안에선 배우의 ‘순환’이 멈추고, 캐스팅 답보 상태가 이어진다. 그리고 훗날엔 지금의 주연 배우들의 뒤를 이을 배우가 사라지는 결과까지 초래할 수 있다.
한 뮤지컬 관계자는 “티켓파워가 있는 배우, 실력 있는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은 당연하다. 제작사 역시 수익을 내야 하는 사업이기 때문”이라면서도 “지금 뮤지컬계에서 ‘대배우’라 불리는 배우들에 한정돼 공연이 돌아가는 현상, 또 실력이 뒷받침 되지 않은 아이돌을 주연으로 세우는 현상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이어 “뮤지컬 자체의 시스템도 문제지만, 배우 중심 체제는 소수의 전유물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곧 뮤지컬의 대중화와도 연결된다”면서 “실제 ‘뮤덕’이라고 불리는 뮤지컬 팬들 사이에서도 캐스팅에 식상함을 느껴 ‘탈덕’하는 사례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스타를 캐스팅하는 것과 동시에 신인 배우를 발굴하는 것에도 힘을 쏟아야 할 때”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