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㊹] 1차 아편전쟁, 누가 진정한 승리자였을까
입력 2021.08.31 14:01
수정 2021.08.31 10:00
1840년 4월 7일, 영국 상원은 대중국 전쟁을 의결했다. 전쟁 결의안이 5월 12일 하원에서도 통과되면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5월 30일 인도 총독 오크랜드가 함대를 이끌고 광둥을 향해 출발했다. 함대는 남서 몬순(Monsoon)을 타고 6월 28일 광둥 앞 마카오 연해에 도착했다. 중국에 도착한 영국 함대는 군함 16척, 수송선 27척, 동인도 회사 소속의 포함 4척 등이었다. 수송선에는 약 4천 명의 병력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것이 아편전쟁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아편전쟁이라는 표현처럼, 이 전쟁 결정은 개전 이전부터 정당성을 찾기 어려웠다. 영국 의회에서 대중국 개전을 의결하는 과정에서도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 휘그(Whig)당은 전쟁을 주장했다.
“(우리는) 패배와 굴복, 혹은 치욕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않은 국가이며, 자국민을 위협하는 자들에게 놀라울 정도의 배상금을 받아내는 국가이며, 영사를 모욕한 알제리 군주를 굴욕스럽게 만든 국가이며, 플라시(Plassey) 황야의 감옥(the Black Hole)에서 희생된 이들을 위해 복수하는 국가이며, 위대한 호민관(the Great Protector)이 영국 시민으로 하여금 과거의 로마 시민이 향유하는 것과 똑같은 명성을 누리게 하겠다고 맹세한 이래로 쇠약해진 적이 없는 국가이다. 그들은 우리가 비록 적에게 포위되거나,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끝없이 넓은 바다와 대륙에 고립되어 있다 해도, 어느 누구라도 영국 시민의 털 한 울이라도 상하게 하면 틀림없이 처벌받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토머스 배빙턴 매콜리(Thomas Babington Macaulay)
이는 영국판 ‘나는 로마 시민이다(Civis Romanus sum)’, 즉 ‘팍스 브리타니카(PaxBritannica)’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반면 토리(Tory)당은 전쟁에 반대했다.
“원인을 두고 볼 때, 이 전쟁보다 더 의롭지 못한 전쟁이 있었고, 이 전쟁보다 더욱 우리나라로 하여금 영원히 치욕스럽게 만들 전쟁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알지도 못하고, 또 읽어보지도 못했다. 저 건너편의 존경스러운 신사께서는 (중국) 광둥에서 바람을 맞으면서 펄럭이고 있는 영국 국기를 이야기했다. 그 국기는 파렴치한 밀무역을 보호하기 위해서 게양되어 있다. 이전까지 (밀무역과 같은 목적을 위해) 국기를 중국 연해에서 게양한 적은 없었으며, 만일 지금 게양되어 있다면, 우리는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그곳에서 물러나야 한다.” - 윌리엄 글래드스턴(William Gladstone)
글래드스턴은 과연 영국이 ‘파렴치한 (아편) 밀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과연 전쟁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질문했다. 하지만 결국 토리당의 반전 결의안은 부결되었다. 결과는 찬성 262, 반대 271로 겨우 9표 차이였다.
이때 광둥 총독이었던 임칙서 역시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영국에 대응하는 청의 통상적인 방식은 영국 상인을 인질로 삼는 것이었다. 청은 영국 상인의 광동 무역을 금지하고, 그들이 머물고 있는 마카오에 대한 식량 공급을 중단하는 식으로 대응해 왔다. 이러한 방법은 매우 유효적절했고, 과거 여러 차례 효력을 발휘했다. 임칙서 역시 통상적인 대응 방식을 답습했다. 실제로 광둥 앞바다에 집결했던 영국 해군 중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사라지자, 그는 이번에도 통상적인 대응 방식이 적중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것은 임칙서의 오산이었다.
광둥 앞바다에서 사라진 주력함대는 철수한 것이 아니었다. 양쯔강 입구에 위치한 저우산군도를 향해 북상 중이었다. 7월 5일 영국 주력함대는 저우산군도(舟山群島) 앞바다에 도착했다. 저우산을 지키던 청군은 갑자기 나타난 영국 함대를 무역선으로 착각할 정도로 당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영국 함대가 저우산군도를 지키는 청군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나서야 청군은 이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영국 해군은 청군이 항복을 거부하자 함포 공격을 통해 요새를 점령하였다.
청은 딜레마에 빠졌다. 왜냐하면 영국 주력함대가 저우산군도를 공격한 이후 다시 북상을 시작했는데,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청군이 방어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영국 주력함대의 목표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영국 해군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전략적 거점에 병력을 배치할 수는 없었다. 청군의 대응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청이 영국 함대의 목표를 제대로 파악한 것은 8월 9일이었다. 영국 함대는 저우산군도를 공격한 이후 계속 북상하여 수도 베이징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칭다오까지 접근한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상 영국군의 최종 목표가 베이징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청의 입장에서 보면 국가의 존립과 직결될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청은 서둘러 영국 측과 협상을 시작했다. 이때 청의 전권대사로 임명된 기선(琦善)은 가장 시급한 문제가 베이징을 영국군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고의적으로 교섭 장소를 광둥으로 영국 측에 요구했다. 영국 측 전권대사였던 찰스 엘리엇(Charles Elliot)이 순순히 기선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9월 17일을 기점으로 영국 함대는 남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841년 1월 21일, 찰스 엘리엇과 기선은 광둥에서 촨비 가협정을 체결했다. 하지만 이 가협정은 정식으로 조인되지 못했다. 영국과 청 모두 비준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다시 양쯔강을 중심으로 전투가 재개되었고, 영국이 전략적 요충지인 진강을 점령하면서 최종적으로 전쟁은 청의 패배로 끝났다. 이후 영국과 청은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광저우 등 다섯 개 항구를 개항한다는 내용을 담은 난징 조약을 체결했다.
이 전쟁에서 청의 패인은 다양했지만, 전략적 측면에서 살펴본 청의 가장 큰 패인은 영국군의 공격 목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군사력을 분산시킨 것에 있었다. 영국의 승리 역시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영국의 일방적 승리는 아니었다. 사실 찰스 엘리엇이 결정적 승기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선의 요구를 수용한 것도 청의 노림수에 넘어가서가 아니라, 영국군 내부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군 주력부대는 인도군이었다. 그런데 ‘인도군 중 서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라는 당시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영국군 내에 콜레라가 퍼지면서 사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으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영국을 위협했고, 이에 대응해야 하는 인도군을 더 이상 중국 전선에 투입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의 개막이었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soothhistory@nah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