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올드무비㊼] 주인공이 잘생겨서 별 다섯? 예술, 욕망, 에곤 쉴레
입력 2021.07.06 08:05
수정 2021.07.06 09:20
화가나 시인, 음악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을 좋아한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개연성 있는 상상력이 보태진 영화들을 보노라면, 세부 사항은 과거 현실과 다를지라도, 그 사람의 생애와 철학 개요를 알게 되고 명작 탄생의 숨겨진 이야기를 알게 되는 재미가 있다.
특히 화가의 경우엔 익히 알고 있던 명화 속 인물이나 배경이 살아나 현실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만 같아 특별한 경험이 된다. 반대로 영화를 보고 난 후 작가의 그림들을 찾아보면, ‘아, 영화 속 그 장면이 이 그림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구나’ 싶은 명화를 만날 때 어쩐지 그 그림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은 판타지를 경험하기도 한다.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감독 디터 베르너, 수입·배급 티캐스트, 2016) 역시 같은 맥락의 재미와 흥분을 기대하며 택한 영화였다. 그런데 조금 달랐다, 특별했다. 그 특별함을 이 영화의 특성만으로 설명해 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재주가 부족해 다른 영화와의 차이를 통해 얘기해 본다.
영화 ‘토탈 이클립스’(1995)는 현대 시의 문을 면모를 바꿔 놓았다고 평가받는 아더 랭보(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분)와 어린 천재를 세상으로 이끈 시인 폴 베를렌느(데이빗 듈리스 분)의 격정적 부딪힘을 그렸다. 프랑스 전역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고 나면, 도전적이고 열정적이었던 랭보의 강렬한 모습 뒤에 가려져 있던 면모, 세상 그리고 그 밑바닥 삶에 대해 다감한 눈길과 순수한 책임감을 지닌 ‘시심’이 다가온다. 무엇을 써야 하는지를 아는 천재와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아는 노력형 스승이 맞부딪쳐 아프게 성장하는 모습은, ‘관계’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남긴다.
영화 ‘리틀 애쉬’(2008)는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로버트 패틴슨 분)와 스페인의 대표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자비에 벨트란 분)가 거장으로 성장하기 전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변화의 바람이 시작된 사회에서 예술가들이 이를 선도 하기도 하고 방향을 고민하기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혁명과 예술의 관계, 그 사상적 역할이 중요한 이도 있으나 그 변혁의 세상에서도 사랑과 예술을 탐닉하는 이도 있다. 누가 옳다, 누가 그르다 할 수 없는 타고난 기질과 취향과 다져온 세계관의 차이다.
영화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이하 ‘에곤 쉴레’)에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 에곤 쉴레(노아 자베드라 분)와 격정적이고 열정적 교우를 나누는 상대가 없다. 에곤 쉴레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표현주의 선두자 구스타프 클림트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 주제 의식이 담기진 않는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에곤 쉴레이고, 쉴레의 예술을 향한 욕망 자체다. 네 명의 뮤즈가 주연에서 조연에 이르기까지 등장하지만,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네가 필요해!”라는 영화 속 쉴레의 말처럼 그림이라는 예술을 욕망하는 쉴레의 욕망에 비하면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아티스트 에곤 쉴레의 욕망에 마주한다. 아더 랭보가 구시대를 끝낼 ‘새로운 시’를 갈망하고 온몸을 받쳐 새로운 것을 새롭게 썼다면, 살바도르 달리가 발붙인 현실이 아니라 초현실로 마음을 돌려 세상에 없는 것들을 없던 방식으로 그렸다면, 에곤 쉴레는 ‘새로운 예술은 없고 새로운 예술가가 있을 뿐’이라는 자신 생각 그대로 스스로 새롭고자 자신을 괴롭혔다. 그는 자연이나 도시보다는 사람의 욕망, 인간관계의 욕망이 그대로 드러나는 육체를 주로 누드로 그렸고, 연인들의 성교나 자신의 자위행위를 화폭에 담기도 했다. 모델료가 부족할 만큼 가난했던 쉴레는 자화상을 많이 남긴 화가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새로이 깨닫게 된다. 에곤 쉴레가 욕망했던 건 자신의 욕망,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예술 자체를 향한 욕망이었다는 것을. 예술에 사로잡혀, 손을 뻗어도 뻗어도 닿지 않는 예술을 갈망하는 예술가의 삶이 보인다. 어떠한 순간, 무엇을 하는 순간에도 그림을 향한 생각을 멈출 수 없고 그리기를 멈추지 못하던 에곤 쉴레. 돈도 여자도 성공도 아닌 예술을 욕망하게 된 예술가의 삶은 처연하다. 소녀를 비롯해 모델이자 연인, 아내이자 모델을 예술을 위한 도구로 쓰기 이전에 에곤 쉴레 자신을 예술의 재단에 바쳤다.
1890년에 태어난 에곤 쉴레를 스물여덟 살을 일기로 저세상으로 데려간 건 당시 유행하던 스페인독감이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가라앉을 줄 모르는 요즘이어서 에곤 쉴레를 다룬 영화에 손이 갔을까.
영화를 보기 전 왓챠에 올라온 감상평을 읽어 보니 주인공의 훈훈한 외모에 별점을 보탠다는 글들이 눈에 띄었다. 틀린 말이 아니더라. 우리에게 자주 소개되지 않는 동유럽의 조각 미남 배우 노아 자베드라가 에곤 쉴레를 맡았는데, 에곤 쉴레가 그러했듯 작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연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쉴레는 연기한 노아 자베드라는 랭보를 연기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달리를 연기한 로버트 패틴슨에 못잖은 미모이고 열정적 연기를 과시했다.
예술을 욕망한 예술가 에곤 쉴레를 영화로 만난 지 사흘이 지났는데 풀지 못한 숙제가 하나 남아 있다. 그림을 그 무엇에도 양보하지 않았던 화가, 그의 도덕성을 비난할 수 있을까. 어쩌면, 어떻게 탄생했는지 과정에 대한 깊은 관심 없이 훌륭한 예술작품을 보고 열광하기에 여념 없었던 관람자, 나도 에곤 쉴레의 예술적 이기주의가 받을 비난에 한 점 책임이 있는 건 아닐까. 이제 세상의 명작 앞에 조건 없이 박수하는 일도 조심스러워야 할까, 그 제작의 과정에 마음 다친 이는 없는지 면밀히 확인하기 전에는 박수를 보류해야 할까.
아니, 다른 무엇도 아닌 예술 자체를 욕망하는 예술가로서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일까, 그 고통을 헤아리지도 못하겠다. 예술을 향한 진지하고도 뜨거운 욕망에 마주하고 보니 어려운 숙제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