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일·김성혜·김순희의 마법!...'엄마 만세'를 '오페라 만세'로 만들었다
입력 2021.04.09 09:04
수정 2021.04.09 11:30
한국소극장오페라축제 흥행돌풍 주역...“코로나블루 날린 웰메이드 작품” 찬사
바리톤 장성일은 보통 남자들보다 덩치가 크다. 그 몸에 가발 쓰고 치마 입고 나타났으니 웃음폭탄은 이미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오페라단에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열혈엄마 ‘아가타’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딸의 오페라 출연 분량이 적다고 불평하더니, 아예 마에스트로와 대본작가에게 “딸의 이중창을 넣어달라”며 압력을 행사한다. 돈봉투를 앞세워 작곡에까지 개입하는 막가파 연기를 능청스럽게 해낸다. "돈으로 자리를 매수했다"는 상대방의 공격에 "넌 한물간 가수야"라며 맞대응 할 땐, 베테랑의 기량이 고스란히 드러나며 단박에 팬심을 사로잡았다.
소프라노 김성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수준 낮은 가수들과 한무대에 서는 게 창피하다며 시도 때도 없이 독설을 날리는 ‘프리마돈나’를 맡았다. 콧대 높은 주인공을 연기하는 만큼, 막이 오르자마자 “복수하리라, 마침내 복수하리라” “모든 슬픔 사라지고, 기쁨의 날 다가오네” 등 고난도 아리아 2곡을 연속해서 부르며 괴력의 매력을 뽐냈다. 아직 목이 덜 풀린 상황에서도 고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콜로라투라의 솜씨를 제대로 선물했다.
엑설런트! 이야기는 촘촘했고 노래는 빈틈이 없었다. 코로나 블루 때문에 웃을 일 없는 요즘, 관객들은 오랜만에 웰메이드 오페라 덕에 눈호강과 귀호강을 했다. 제19회 한국소극장오페라축제 둘쨋날을 수놓은 <엄마 만세>가 익사이팅 재미를 선사하며 축제 흥행돌풍의 핵으로 떠올랐다. 7일 오후 7시30분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을 찾은 팬들은 장성일·김성혜·김순희·정준식·정제윤 등 9명의 성악가들이 엮어가는 120분의 향연에 브라보 브라바를 외쳤다.
<엄마 만세>는 도니제티의 풍자 오페라 <비바 라 맘마(Viva la mamma!)>를 최지형이 번역·각색한 작품이다. 명확한 메시지 전달을 위해 가사를 모두 우리말로 번안해 무대에 올렸다. 지휘 권성준, 연출 장서문이 힘을 합쳐 치맛바람이 휩쓸고 간 오페라단 공연 풍경을 유쾌하게 그려냈다.
스토리가 이색적이다. 흥미롭다. 이탈리아 어느 작은 도시 극장에서 오페라 <로몰로와 에르실라> 공연을 앞두고 있다. 리허설이 한창 이지만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하면서 삐걱거린다.
여주인공을 맡은 프리마돈나(소프라노 김성혜 분)는 노래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시골 가수들과는 리허설을 할 수 없다며 참여하지 않는다. 남자 주인공 역을 맡은 독일인 테너 가수(테너 정제윤 분)는 이탈리아어 가사를 다 외우지 못하는 데다 실력도 없어 음악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다. 거기에 카운터테너(메조소프라노 김순희 분)까지 가세해 내 가창 분량이 적다며 자신이 더 많이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티격, 저기서 태격 온통 싸움판이다.
이런 소동 중에 조역 여가수인 루이자(소프라노 박미화 분)의 엄마 아가타(바리톤 장성일 분)가 등장해, 자신의 딸이 맡은 배역의 음악이 빈약하다며 아리아를 더 넣어 달라고 요구한다. 심지어 작곡에까지 개입해 오페라를 쥐락펴락한다. 샌드위치 신세가 된 마에스트로(바리톤 문명우 분), 대본작가(바리톤 황규태 분), 제작자(베이스바리톤 김준빈 분)는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어떻게든 공연을 열려고 이들을 달래보지만 역부족이다.
갈등은 갈수록 심해져 예정됐던 원래의 가수가 바뀌는 해프닝이 속출한다. 공연 직전에 프리마돈나의 남편인 프로콜로(바리톤 정준식 분)까지 갑작스럽게 출연하게 된다. 또 대본이 수시로 수정되는 등 뒤죽박죽이다. 결국 공연이 취소됐다는 소식이 들리자 선불을 받은 출연자들은 슬그머니 떠나 버린다. 투자 받은 제작비를 이미 다 써버려 돈을 갚지 못할 끔찍한 결과를 걱정하며 모두 짐을 싸 야반도주한다.
플롯이 워낙 탄탄해 러닝타임 120분이 짧게 느껴진다. 정상의 성악가들이 출연하는 만큼 중간에 우리 귀에 익은 유명 오페라 아리아 3곡이 보너스로 나온다. 뜬금없는 등장이 아니라 이야기 전개와 잘 어울리게 적재적소에 끼워 넣는 치밀함이 돋보인다. 청량함을 선사하는 사이다 역할을 독특히 한다.
‘카운터테너’ 김순희는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에 나오는 ‘에우리디체 없이 어찌 살까’를, ‘아가타’ 장성일은 로시니의 <오텔로>에 흐르는 ‘버들의 노래’를 부른다. 또 ‘프리마돈나’ 김성혜와 ‘루이자’ 박미화는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중 ‘편지 이중창’으로 멋진 하모니를 들려준다.
한 관객은 “코로나 탓에 공연이 취소되거나 축소되는 상황이 계속돼 너무 안타까웠는데, 가뭄 속 단비처럼 이번에 <엄마 만세>를 재미있게 봤다”라며 “성악가들의 연기와 노래가 나무랄 데 없어 <오페라 만세>가 됐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한편 이번 한국소극장오페라축제에서는 3편의 창작오페라와 2편의 번안오페라를 선보인다. 지난 6일 개막했고 오는 25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열린다. 오페라계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동(예술감독), 이강호(제작감독), 양진모(음악감독)가 다섯작품 모두에 힘을 보탰다.
창작오페라로는 <김부장의 죽음>(작곡 오예승·대본 신영선·지휘 정주현·연출 정선영), <달이 물로 걸어오듯>(작곡 최우정·대본 고연옥·지휘 조정현·연출 표현진), <춘향탈옥>(작곡 나실인·대본 윤미현·지휘 나실인·연출 김태웅)이 공연된다.
또한 번안오페라로는 <엄마 만세>(작곡 도니제티·대본 길라르도니·번역 및 각색 최지형·지휘 권성준·연출 장서문)와 <서푼짜리 오페라>(작곡 바일·대본 브레히트·번역 양진모·지휘 박해원·연출 및 각색 이회수)가 무대에 오른다.
이번 축제는 처음으로 여러 오페라를 번갈아가며 공연하는 레퍼토리 시스템을 도입해 5개의 오페라를 선택해서 볼 수 있다. 작품들은 모두 한국어 대사와 노래로만 구성된 ‘100% 우리말 오페라’로 초심자부터 마니아까지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또한 평균 90분 정도의 짧은 공연시간으로 오페라 감상 부담을 줄였다. 성악가들의 노래와 연기를 무대와 가까운 소극장 객석에서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어 큰 감동을 전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