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는 왜 K7 건너뛰고 K8으로 갔나…"脫 그랜저"
입력 2021.03.24 06:00
수정 2021.03.23 14:30
덩치 키우고 AWD·메리디안 사운드 등 고급 사양 추가해 차별화
그랜저와 판매간섭 최소화하고 고급 오너드리븐 세단 수요 대응
3·5·7·9. 그동안 기아의 세단 라인업 K시리즈의 차급을 나타내던 숫자다. 2009년 K7을 시작으로 줄곧 홀수 넘버링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12년 만에 그 규칙이 깨졌다. K시리즈의 시작을 알린 K7이 사라지고 ‘짝수’가 붙은 K8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기아는 지난 23일 차세대 준대형 세단 K8의 주요 사양과 가격을 공개하고 사전계약에 돌입했다.
K7에서 K8으로 바뀐 이름은 준대형 세단 라인업에서 기존과는 확연히 다른 전략을 취하겠다는 기아의 의지를 대변해준다.
현대차와 기아가 플랫폼을 비롯한 대부분의 부품을 공유하는 특성상 두 회사의 동일 차급의 차종은 상호 판매 간섭이 심했었다.
특히 K7은 준중형 차급에서 현대차 그랜저가 가진 대표 차종의 상징성에 밀려 상품성과 별개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더구나 2019년 11월 출시된 더 뉴 그랜저는 페이스리프트(부분변경) 모델임에도 불구, 국내 전 차종을 통틀어 최다 판매 행진을 이어가며 K7의 판매를 더욱 위축시켰다.
기아가 K7에서 숫자를 하나 더 올린 것은 차별화된 상품성으로 ‘그랜저의 굴레’를 벗어나겠다는 전략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그랜저보다 더 크고 럭셔리한 세단을 원하는 소비자들을 공략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기존 K7으로는 부족하고 K9으로는 과했던 고급 오너드리븐(직접 운전하는 차) 세단 수요에 대응하겠다는 의도도 읽힌다.
실제 K8은 기존 K7보다 크기를 한층 키워 그랜저 대비 경쟁력을 높였다. 전장(5015mm)은 20mm 늘려 5m를 넘겼고, 전폭(1875mm)도 5mm 늘렸다. 실내 공간을 좌우하는 축거(휠베이스, 2895mm)는 40mm 늘려 뒷좌석의 편안함을 강화했다.
그랜저와 비교하면 전장은 15mm, 축거는 10mm 길고, 전폭은 동일하다.
특히 디자인적으로 그랜저가 덩치에 비해 콤팩트한 외양을 갖춘 반면, K8은 실제보다 더 커 보이는 모습을 가졌다.
그랜저가 소비자 저변 확대를 위해 젊어진 느낌이라면 K8은 기존보다 고급스런 분위기를 풍긴다. ‘젊어진’ 그랜저에 거부감을 느낀 수요층이 수입차 등으로 이동하지 않고 K8로 흡수될 수 있는 그림도 기대해볼 만 하다.
K8은 감성품질 면에서도 그랜저와 차별화하는 요소들을 반영했다. 영국의 하이엔드(Hi-end) 오디오 시스템 브랜드 메리디안의 프리미엄 사운드 시스템이 대표적이다.
메리디안 프리미엄 사운드는 세계 최초로 천연 원목 재질의 진동판을 사용한 14개의 나텍(NATec) 스피커를 장착했으며, 고음을 담당하는 트위터 스피커는 티타늄 소재의 진동판을 적용해 오디오 마니아들의 소장용 스피커 못지않은 음질을 제공한다.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 차종에 적용되던 에르고 모션 시트도 대중 브랜드 차종 중에서는 처음으로 K8에 가져왔다. 공기 주머니를 개별적으로 제어해 스트레칭 효과를 주거나 고속 주행시 버킷 시트와 같은 역할을 허거나, 장기간 운전시 편안한 자세를 유지하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
3.5 가솔린 모델의 경우 국산 준대형 세단 최초로 전륜 기반 4륜구동(AWD) 시스템을 적용한 것도 그랜저와 차별화되는 강점이다. 전·후륜 쇼크 업소버(shock-absorber) 감쇠력 제어를 최적화해주는 전자제어 서스펜션도 적용했다.
첨단 주행보조 기술도 그랜저보다 한 단계 진보했다. K8에 적용된 고속도로 주행 보조 2(HDA2)는 그랜저에 적용된 HDA1에는 없는 차로 변경 보조 및 차로 내 편향 주행(옆 차량과 근접시) 등 다양한 안전 기술이 추가됐다.
파워트레인도 그랜저와 차별화했다. 2.5 가솔린 모델은 유지하되, 상위 모델인 3.0 가솔린은 배기량을 3.5로 높였고, LPG 연료를 사용하는 LPI 도 기존 3.0에서 3.5로 상향해 성능을 강화했다.
배기량이 높아졌음에도 신규 8단 변속기 등을 적용해 연비는 3.5 가솔린이 K7 3.0 가솔린보다 6% 좋아졌고, 3.5 LPI 모델도 기존 K7 3.0 LPI보다 5% 향상됐다.
그랜저는 2.5 가솔린 외에 3.3 가솔린과 3.0 LPi 모델을 운영하고 있어 체급상으로 K8이 그랜저보다 상위에 자리하는 모양새가 됐다.
상반기 중 추가되는 하이브리드 모델 역시 쏘렌토를 통해 검증된 1.6 가솔린 터보 하이브리드를 장착해 그랜저와 차별화할 예정이다. 그랜저 하이브리드 모델은 2.4 가솔린 자연흡기 엔진 기반으로, 배기량은 그랜저가 더 높지만 연비와 동력성능은 K8이 우위를 보일 전망이다.
K8은 이처럼 제원상으로 그랜저보다 상위로 포지셔닝하고도 가격 측면에서는 기존 K7이나 그랜저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K8 2.5 가솔린의 경우 3279만~3868만원으로 그랜저 2.5 가솔린(3294~4108)보다 오히려 저렴하다. 배기량이 그랜저보다 높은 K8 3.5 LPI 모델 역시 가격은 3220만~3659만원으로 그랜저 3.0 LPI(3328만~3716만원)보다 낮게 위치해 있다.
K8 3.5 가솔린은 3618만~4526만원으로 그랜저 3.3 가솔린(3578만~4349만원)보다 다소 비싸다. 다만, 이는 배기량 차이 뿐 아니라 4륜구동 모델이 추가됐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통상 같은 차종, 같은 트림 내에서도 4륜구동 모델은 2륜구동 모델 대비 200만~300만원가량 비싸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제네시스라는 별도의 프리미엄 브랜드를 보유한 현대차와 달리 기아는 고급감을 갖춘 오너드리븐 세단이 애매했던 게 사실”이라며 “K8이 기존 K7보다 차체를 키우고 고급감을 강화하면서 그랜저와 판매간섭을 줄이면서도 기아 라인업의 빈틈을 채우는 역할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