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캐릭터탐구②] 남궁민 연기대상 부른 ‘스토브리그’ 백승수
입력 2021.02.17 01:00
수정 2021.02.16 23:11
새롭진 않았다. 남자주인공이 ‘착한 사람’ 아닌 게 한두 번인가. 여자주인공이야 지켜 주고 싶게 연약하고 착하거나 당하고 당해도 일어서는 ‘캔디형’일 때가 많지만, 남주는 여주를 배신하기도 하고 성공에 눈이 먼 사람일 때도 많았다. 말수 적고 표정 없고 조용한 것으로 치면 드라마 ‘비밀의 숲’ 황시목 검사(조승우 분)가 먼저였다.
그런데 백승수는 좀 달랐다. 냉정하고 분명한 게 일 처리 방식인지 성품인지 자꾸 생각하게 했다. 무표정에 독단적이고 직설적인 게 타고난 성격인지 어떤 일들을 겪으며 귀결된, 상처를 가리는 방어막인지 고민하게 했다. 이런 생각과 고민을 한 건 단숨에 좋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고로 주인공을 좋아할 때부터 드라마에 빠져든다. 좋아해야 할지 미워해야 할지 판단이 설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신기한 건, 형언하기 힘든 매력이 있었다. 일 처리 방식인 게 아니고 성품이 나쁜 걸지도 모르겠지만, 숨겨 둔 상처의 딱지가 아니라 성격이 못된 것일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믿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 좀 지켜보자, 백승수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알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놀랐다. 백승수가 친구를 할까 말까, 동업할까 말까를 고민해야 하는 현실의 상대가 아니잖은가. 그런데 이런 판단유보를 하며 그에게 시간을 주고 기다린 것이다. 와, 배우 남궁민이 연기를 이렇게 잘했나, 일상 속 지인을 바라보듯 그렇게 백승수를 보도록 만들었다. 현실감 있는 연기를 한 것이다. 덕분에 ‘직장 상사였으면 사표 쓰고 싶겠다’ 가슴이 갑갑해지기도 했고, ‘저 남자의 고독은 누가 위로해 주지’ 걱정이 밀려오기도 했다.
사실 남궁민이라는 배우에 대한 불호도 없었지만 ‘호’(좋아함)도 형성돼 있지 않았다. 표현이 세밀하고, 눈길 끄는 디테일이 많은 게 개인적 취향에서 벗어나 있어서였다. 백승수를 연기하면서 남궁민은 표현을 극도로 자제했다. 자제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아니고 아주 미세한 표현들로 연기했다. 보이지 않을 듯 보이는, 무인 듯 유의 연기를 관찰하고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백승수로 배우 남궁민이 좋아졌다. 기존과 다른 연기, 취향 저격의 연기로 설득한 게 아니고 ‘남궁민 식’ 연기로 좋아하게 만들었다. 적을 내 편으로 만드는 설득력 최고의 연기다.
드라마 속에서도 백승수는 드림즈 구단 직원들을 하나둘씩 내 편으로 만들어갔다. 인간적 감화가 아니라 실력으로, 국가대표 선발투수 강두기(하도권 분)를 드림즈로 데려오는 것부터 시작해서 하는 일마다 놀랍도록 좋은 결과를 내며 마음을 얻어 갔다. 백승수가 준비한 극적 카드에 짜릿한 재미를 느끼면서도 ‘것 좀 같이 공유하며 일을 추진하지, 혼자 내달리네. 결과만 좋으면 장땡인가’ 못마땅해하기도 했다. ‘권경민(오정세 분)과 뭐가 달라, 목적이 다를 뿐인지 일벌레인 것도 같고 독선적인 것도 똑같네’ 빈정거리기도 했다.
그러다 한 방 맞았다. 백승수 단장이 이세영 팀장(박은빈 분)에게 고세혁 팀장(이준혁 분)을 믿는 이유를 물었을 때, 이세영을 지지했는데 고세혁이 문제 많은 팀장이자 인간임을 알게 됐을 때. 근거를 가지고 사람을 믿거나 좋아해야 한다는 것, 반대로 믿지 못하고 싫어할 때도 그러해야 한다는 당연한 원칙에 직면했을 때 백승수에 관한 믿음이 굳어졌다. 아, 백승수가 일을 잘하는 이유가 저거였구나! 기본에 충실한 것, 그것이 백승수라는 인물의 ‘정의’였구나. 그의 태도와 선택에 관한 오해가 풀리고 이해가 깊어졌다.
믿음을 가지고 보니 그의 상처가 보였다. 오래도록 아버지 병원비와 다친 동생의 생활까지 책임진 가장의 무게가 보이고, 동생의 장애에 대해 가지는 죄의식과 책임감이 보이고, 가슴에도 묻을 수 없는 사산아의 아비였던 고통이 헤아려졌다. 누구라도 표정을 잃고 누구라도 말수가 적어질 상황이 보였다.
백승수 단장을 지지하게 되기까지 드라마 감상을 중도에서 멈추지 않게 한 일등공신은 ‘어쩐지 믿어 보고 싶게 만든’ 남궁민의 매력과 연기다. 단역부터 조연, 주연까지 차근히 성장해 온 저력이 십분 발휘됐다. 그리고 이신화 작가의 대본, 신선미와 흥미를 유지하면서도 사회적 메시지를 녹여 내는 철학과 재능에 박수를 보낸다. 정교한 퍼즐 속에 인간의 희로애락을 촘촘히 담아냄과 동시에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 그 기본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스토리가 우리를 붙들었다.
더불어 밝은 에너지와 천연덕스러운 연기력을 지닌 박세은, 어떤 역을 맡겨도 정말이지 ‘이것 외에 정답이 있을까’ 연기의 정석을 맛깔나게 보여 주는 오정세, 통통 튀는 탄력을 지닌 배우 조병규, 열정과 개성이 빛나는 배우 윤병희, 현실 속 직장인을 실감 나게 연기한 김수진, 언제나 주제어를 차지게 발화해 준 세은이 어머니 역의 윤복인 배우, 조한선을 위시해 드림즈 식구들과 이대연을 비롯해 드림즈 밖 인물들까지 이름을 다 적지 못해 아쉬운 좋은 배우들의 찰떡 연기가 백승수를 향한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뀔 때까지 기다릴 힘을 주었다. 끝내는 극 중에서도 백승수 단장을 지켜내는 역할을 했고!
그러한 선순환 속에 백승수 단장도 변했을 것이다. 우승 후 해산, 우승 후 해산의 세 번째 ‘붕어빵’을 굽지 않고 어떻게든 해단을 막아 보려는 인간미가, 아픈 과거들에 안으로 숨어들었던 인간미가 살아났다. 16부작 드라마를 다 보고야 알 수 있었다. 그토록 이질감을 느끼며 이리 재고 저리 재며 바라본 백승수가 사실은 상처 입은, 상처 입었지만 그래도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였다는 것을. 나를 거울로 보며 나인 줄 모르고 낯설어했다는 것을.
오랜만에 좋은 드라마를 봤다는 생각, 대상 받아 마땅한 작품이고 백승수였다. 꼴찌에서 우승 후보로 탄탄히 성장해가는 드림즈와 닮은꼴, 공채 시험에 계속 떨어졌다는 배우가 연기대상을 차지하는 꿈의 수상, 남궁민에게 백승수는 운명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