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건너 청와대로´ 계속되는 신화 창조
입력 2007.12.21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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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대통령 이명박, 그는 누구인가> 샐러리맨 신화 →청계천 신화 →대권 신화
"신화는 없다...대한민국 위해 온 몸 바쳐 죽어라 일하겠다"
‘샐러리맨 신화’, ‘청계천 신화’, 그리고 ‘대권 신화’까지.
이명박 제17대 대통령 당선자가 걸어온 길엔 항상 ‘신화’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보통 사람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과 경험하기 힘든 기적들로 채워진 그의 일대기.
그러나 이 당선자 자신은 “신화는 없다”고 한다.
수없는 위기에 맞닥뜨리면서도 버리지 않았던 스스로에 대한 신념이 그의 리더십을 담금질할 수 있었다는 게 이 당선자의 말이다.
이 나라 60대들이 대부분 그랬듯, 이 당선자는 일제 식민시대와 광복, 6.25전쟁과 자유화, 군사독재정권과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와 세계화로 이어지는 격동의 파고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넘어왔다.
철들기 전부터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벌였던 좌판은 그를 강인하게 단련했고,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도 안정된 가풍을 만들었던 어머니는 그의 인간성 형성에 자양분을 제공했다.
가난한 집안형편 때문에 이 당선자는 중학교 입학 때부터 뻥튀기 장사, 과일행상, 환경미화원 등을 하며 생활비와 학비를 벌었다.
대학시절엔 ‘6.3운동’의 주모자로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을 복역, ‘민주화 투사’라는 이력을 보태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당선자의 인생 역전이 시작된 것은 ‘왕회장’이라 불리던 고(故)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만나면서부터다.
타고난 부지런함과 과감한 문제 제기로 현대건설에 입사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대리로 승진한데 이어 29세 이사, 35세에 사장 등 ‘기업인 이명박’은 산업화 열풍의 한 가운데에서 국내 최장수 CEO(최고경영자)의 역사를 쓸 수 있었다.
‘샐러리맨의 신화’로까지 불리던 이 당선자가 정치판에 뛰어든 것은 1992년 당시 신한국당 대표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전국구 공천을 통해서다.
이 당선자는 앞서 노태우 정권 말기였던 1991년 정주영 회장이 1600억원에 달하는 추징금을 맞은데 반발해 아예 당을 만들어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을 말리기도 했던 터.
결국 이 당선자는 ‘왕회장’과 길을 달리해 집권 여당행(行)을 택했다.
그러나 ‘성공 신화’의 이면이랄까.
이 당선자에게 정치판은 그다지 녹록지만은 않았다.
1995년 서울시장 경선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이듬해 ‘정치 1번지’ 종로구에 출마한 총선에선 이종찬씨를 누르고 당선됐지만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까지 받았다.
이 와중에 98년에 다시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도전, 최병렬씨와 경쟁을 벌였지만 선거법 재판이 마무리되지 않아 끝내 의원직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나야만 했다.
미국에서 1년여간 와신상담한 끝에 99년 말 한국으로 돌아와 당시로선 생소하던 인터넷뱅킹 사업을 시작했지만, 그때 만난 사람이 이번 대선정국 최대 이슈가 됐던 ‘BBK의혹’의 핵심인물 김경준씨.
의욕적으로 새로운 사업을 하려던 차에 김씨가 ‘수익률 조작’ 등으로 금융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자, 이 당선자는 그와의 사업관계를 청산했지만 당시 사건에 대한 개입 여부 등 관련 의혹은 투표일 직전까지도 이 당선자를 옥죄는 ‘꼬리표’가 됐다.
2002년 세 차례의 도전 끝에 서울시장에 당선된 이 당선자는 임기 4년 동안 청계천 복원과 대중교통체계 개편, 서울숲 조성 등으로 강력한 추진력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등 한껏 주가를 올리며 대권주자의 반열에 오른다.
보수 정당 소속이면서도 ‘실천하는 개혁가’라는 이미지 구축에 성공한 그는 ‘경제대통령’ ‘국가CEO(최고경영자)’를 내세우며 1년여 이상 여론지지율 1위를 유지하며 이념, 연령, 계층, 지역에 관계없이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정당사상 최악’이란 평가를 받을 정도로 과열된 당내 경선과 범여권의 무차별적 검증 공세 등 온갖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 입성의 꿈을 이뤘다.
“대한민국을 위해 온 몸을 바쳐서 일하고 싶다. 경제 하나만은 반드시 살리고 5년 간 정말 죽어라고 일하고 싶다.”
이명박 제17대 대통령 당선자, 그의 남은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