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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이건희 별세] 반도체·애니콜·갤럭시까지 '무모한 도전'을 '성공신화'로

박영국 기자 (24pyk@dailian.co.kr)
입력 2020.10.26 06:00 수정 2020.10.25 21:00

‘도쿄 선언’ 통해 D램 사업 진출 선언…“언제까지 일본 속국이어야하나”

1993년 ‘신경영 선언’은 삼성 초일류 기업 반열 올려놓은 전환점

1993년 6월 7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삼성의 주요 계열사 임원들에게 신경영을 주창하고 있다. ⓒ삼성 1993년 6월 7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삼성의 주요 계열사 임원들에게 신경영을 주창하고 있다. ⓒ삼성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전자산업 후발주자였던 대한민국을 일약 세계 최상위권으로 올려놓은 일등공신으로 평가된다.


메모리 반도체부터 휴대폰 애니콜, 스마트폰 갤럭시까지 이건희 회장이 밟아온 족적에는 모두 ‘신화’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시작 당시에는 다들 ‘무모한 도전’이라고 우려했고, 업계 선두 기업들은 비웃음을 보내기도 했지만 고인은 보란 듯이 예상을 깨고 ‘성공 신화’를 이룩한 것이다.


30년 넘게 대한민국의 주력 수출 산업으로 자리해온 반도체 산업은 이건희 회장의 선견지명과 추진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위상에 한참 못 미쳤을 것이라는 게 재계와 업계 중론이다.


삼성은 1974년 파산직전의 한국 반도체 인수와 함께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업계에서는 자본이나 기술, 시장이 없는 국내 상황을 감안하면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비관론이 우세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언제까지 그들(일본)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겠냐”며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한다. 내 사재를 보태겠다”며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1983년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이 ‘도쿄 선언’을 통해 D램 사업 진출을 선언함과 동시에 삼성은 본격적으로 반도체 사업에 역량을 집중했고, 그 선봉에는 이건희 회장이 있었다.


이 회장은 세계적인 전문가들을 직접 찾아 나섰고 스스로 자료를 분석해 나갔다. 실행에도 거침이 없었다. 삼성은 도쿄선언이 있었던 해 11월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했으며, 1986년 7월에는 1메가 D램을 생산하면서 반도체 사업에 자신감을 얻었다. 일본이 주춤거리는 사이 과감한 투자를 계속해 나갔다.


1992년에는 세계 반도체시장을 지배하던 일본 도시바나 NEC,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 등을 제치고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을 개발했다.


1993년엔 기존 6인치 웨이퍼가 주류를 이루던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은 8인치 생산을 결단했다. 삼성은 64메가 D램 개발로 기술 주도권을 확보한 데 이어 생산량을 늘리며 시장 점유율도 1위를 기록, 기술과 생산 모두에서 명실상부한 세계 1위 기업으로 올라섰다.


이후 삼성전자는 D램 세계시장에서 40%가 넘는 점유율로 29년째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는 미국 인텔마저 꺾고 메모리와 비메모리를 모두 합한 반도체 매출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2010년 5월 경기 화성시 삼성전자 사업장에서 열린 반도체 16라인 기공식을 가졌다. 사진 왼쪽부터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최지성 삼성 미래전략실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삼성 삼성전자는 2010년 5월 경기 화성시 삼성전자 사업장에서 열린 반도체 16라인 기공식을 가졌다. 사진 왼쪽부터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최지성 삼성 미래전략실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삼성

가전과 휴대폰 등 소비자와 직접 연결되는 전자제품과 관련해서는 이건희 회장의 강력한 추진력과 함께 ‘품질 제일주의’가 빛났다.


1993년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은 삼성을 지금의 초일류 기업으로 올려놓은 대표적인 전환점으로 회자된다.


당시 품질보다 생산량 늘리기에 급급했던 생산라인에서 불량이 난 세탁기 뚜껑을 손으로 깎아서 조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모습이 사내 방송으로 보도돼 파장은 더욱 커졌다.


미국을 방문 중이었던 이건희 회장은 미국의 대표적인 전자제품 양판점인 베스트바이를 돌아보다가 진열대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삼성 제품을 바라보고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불량 세탁기 고발 영상이 담긴 사내방송 테이프을 전달받은 이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말로 유명한 신경영 선언을 내놓았다.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된 신경영 대장정은 총 8개 도시를 돌며 임직원 18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350여 시간의 토의로 이어졌다. 이 회장은 짧게는 몇 시간에서 길게는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쏟아냈다.


‘애니콜 신화’는 당시 신경영 선언 이후 뼈를 깎는 품질 확보 노력을 통해 탄생했다.


이 회장은 신경영 선언 이후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갖는 시대가 온다”며 삼성의 신수종 사업으로 휴대폰 사업을 예견했다.


국내 휴대폰 시장은 1984년 모토로라 카폰이 처음 등장한 이후 시장은 모토로라가 석권하고 있었다. 삼성은 1994년 10월 애니콜 브랜드의 첫 제품인 SH-770을 출시해 모토로라에 도전장을 던졌다.


애니콜이 시장에 안착하는 과정에서도 이 회장의 품질 제일주의가 빛을 발했다. 출시 첫 해 불량률이 11.8%에 달하자 이 회장은 구미사업장에서 불량품 15만대를 소각하는 충격 요법으로 임직원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이듬해인 1995년 8월 애니콜은 전 세계 휴대폰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로 국내 정상에 올라섰다. 당시만 해도 모토로라는 대부분의 휴대폰 사용 국가에서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삼성에 의해 대한민국에서 그 기록이 깨졌다.


이 회장은 TV 분야에서도 오랜 기간 세계 시장을 지배하던 소니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삼성’을 올려놓았다. 2006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점을 맞은 TV 시장에서 와인병을 닮은 보르도 TV를 출시, 소니를 꺾고 세계 정상에 올라섰다.


휴대폰 시장이 스마트폰으로 전환되던 시점, 이 회장은 또 다른 ‘신화 창조’에 나섰다. 조세포탈 혐의로 삼성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났던 이건희 회장은 2010년 복귀, 갤럭시 시리즈를 잇달아 히트시키며 애플에 빼앗길 뻔했던 모바일 영토를 지켜냈다.


스마트폰 시장 개막 초기만 해도 삼성이 ‘아이폰 열풍’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한 이는 많지 않았으나, 삼성전자는 갤럭시S를 통해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 뒤 갤럭시S2와 S3를 잇달아 히트시키며 애플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여기에 ‘갤럭시노트’ 시리즈로 새로운 스마트폰 카테고리까지 가세하면서 2012년 하반기 애플을 뛰어넘고 글로벌 1위로 올라섰다.


재계 한 관계자는 “대한민국이 전자산업 변방에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서기까지 고 이건희 회장의 강력한 추진력과 선견지명, 세밀한 시장 파악 능력을 바탕으로 한 삼성의 도전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영국 기자 (24py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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