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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이건희 별세] 이건희 누구인가…'신경영'으로 글로벌 도약 이끈 승부사

이홍석 기자 (redstone@dailian.co.kr)
입력 2020.10.25 11:00 수정 2020.10.25 11:13

어린시절 조용한 성격, 다방면에 해박하고 정직을 최우선 가치

무사안일주의 타파로 변화와 혁신 이끌어...글로벌 기업 반열 성과

이 회장 재임시 스마트폰·반도체·TV 등 세계 1위 오른 제품 19개


ⓒ데일리안 DB ⓒ데일리안 DB

이건희 회장은 지난 1942년 부친인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모친인 박두을 여사 사이에서 3남 5녀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 창업주 내외는 삼성상회를 운영하느라 무척 바빴고 이 회장은 부친의 고향인 경남 의령에서 할머니와 함께 자랐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를 어머니로 알고 자랐던 이 회장은 여섯 살부터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다른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었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며 다섯 번이나 초등학교를 옮겨 다녀야 해 잦은 전학으로 또래 친구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친인 이병철 창업주는 이런 이 회장을 위해 장난감들을 많이 사줬는데 이 회장은 장난감들을 가지고 노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분해·조립하는 취미를 가졌고 이러한 취미는 성인이 돼서까지 이어졌다.


이 회장은 학창 시절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성격에 가까웠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그러나 말을 하기 시작하면 쉽게 반박을 하기가 어려운 수준의 지식과 논리를 쏟아내 친구들을 당황스럽게 했다고 한다. 이 회장은 단편적이거나 일시적인 말을 하기보다는 깊이 생각한 뒤 쏟아내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학창 시절 때때로 친구들과는 차원이 다른 생각이나 주장을 내놓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삼성전자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삼성전자

이 회장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를 마친 뒤 1965년 3월 일본 와세다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했고 1966년 9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MBA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삼성 경영 일선에 뛰어들어 그해 10월 동양방송에 입사한 뒤 1968년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이사, 1978년 삼성물산주식회사 부회장, 1980년 중앙일보 이사를 거쳐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이 됐다.


이 회장의 첫 취임 일성은 '위기'였다. 그의 눈에는 취임 당시 삼성에 팽배해 있는 무사안일주의가 가장 큰 위기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입버릇처럼 강조했던 '세계일류'를 위한 변화와 혁신에 대한 강도 높은 주문은 삼성의 DNA를 바꾸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는 위기감의 발로였다.


40대 젊은 나이에 그룹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올르며 외친 변화의 열망은 삼성을 송두리째 바꾸기 시작했다. 취임 이후 전자와 반도체 사업을 통합하는 사업구조 개편을 단행했다. 또 미래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반도체, 우주항공 등 신사업과 R&D에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했다.


이를 통해 삼성의 DNA는 변화하기 시작했고 반도체와 스마트폰으로 눈부신 성장가도를 달렸다. 이 회장의 재임 시기에 스마트폰·반도체·TV 등 세계 1위에 오른 제품은 19개로 그룹 전체 매출은 39배로 껑충 뛰었고 순위에도 들지 못했던 삼성의 글로벌 브랜드 가치는 톱10 반열에 올랐다.


이 회장의 변화와 혁신에 대한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물론 성장의 이면에는 아픔도 존재했다. 지난 1995년 전격적으로 뛰어든 자동차 사업은 외환위기 역풍에 4년 만에 법정관리라는 실패를 맛봤고 2007년 드러난 비자금과 경영권 편법승계 논란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는 좌절도 겪어야 했다. 지난 2013년에는 상속재산을 놓고 맏형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 등 형제들과 소송을 벌이기면서 재벌 비판의 중심에 서기도 했지만 결국 승소했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와 좌절에도 불구하고 그의 변화와 혁신을 통한 성장 의지는 삼성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고 이는 아직도 삼성의 경쟁력으로 뿌리깊게 자리잡았다. 위기를 외치며 혁신의 시동을 거는 경영인으로서 삼성을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는데 막대한 역할을 해냈다.


이 회장은 생애 내내 정직을 생활의 신조로 삼아 정직한 사람을 좋아했고 남을 속이거나 비난하는 일을 극도로 싫어했다. 이 회장은 과거 세탁기 뚜껑 불량 등에 대해 경영진들이 눈 가리고 아웅식으로 대응한 것을 두고 강하게 질책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무사안일주의와 거짓은 경영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의 성격 중 두드러진 부분은 조용하면서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강력한 리더십이다. 젊은 시절부터 현재까지 잃지 않는 침묵 속에서 배어나는 강력한 카리스마는 거함 삼성을 흔들림 없이 항진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이제 그는 국내 기업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영면했지만 그의 리더십은 영원히 후세에도 남게 될 것이다.

이홍석 기자 (redstone@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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