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고사] 엄자릉(嚴子陵) 낚시터(釣魚臺)
입력 2007.11.3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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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안을 통해 처음 공개하는 낚시이야기 <4>
엄자릉(嚴子陵) 낚시터(釣魚臺)
강태공은 사람을 낚았지 고기를 낚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엄자릉은 이와는 반대로 고기를 낚았지 사람을 낚은 것이 아닌 경우로 유명하다. 낚시와 관련하여 사람을 낚았나? 고기를 낚았나? 하는 문제가 종종 등장하는 것은 관리임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른바 낚시는 세속의 명리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러나 산수에 은거하는 고상한 품덕을 내세워 높은 직위를 차지한 경우를 역사 속에서 종종 보곤 한다. ‘종남첩경(終南捷徑)’이란 성어도 또한 ‘종남산에 은거하는 것이 벼슬길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다’는 의미는 사실 진정한 은자에게 치욕이다. 사실 진정한 은자는 역사서에도 이름조차도 남기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엄자릉의 낚시에 얽힌 시비는 엄자릉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 당시 동한 광무제가 왕망의 신을 멸망시키고 정국을 통일한 정국과 맞물려 공연히 오해를 받았을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잠시 사전에서 언급한 엄자릉에 대한 서술을 살펴보자.
엄광(嚴光:기원전37년∼서기43년): 다른 이름이 준(遵). 자(字)가 자릉(子陵). 엄자릉(嚴子陵) 또는 줄여서 엄릉(嚴陵)이라고 부른다. 서한말(西漢末) 여요(餘姚)인. 본래 성이 장(莊)씨인데, 한(漢) 명제(明帝)의 이름을 피하여 엄(嚴)으로 바꿈. 어릴적 후한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함께 뛰놀며 공부한 사이였다. 광무제가 왕망(王莽)의 신(新)나라를 제압하고 제위에 오르자 모습을 감췄다. 광무제가 사람을 시켜 찾아보게 했더니 “양가죽옷을 입고 못에서 낚시하고 있다(披羊裘, 釣澤中)”고 하였다.
광무제는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 그를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광무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그는 예전 친구사이처럼 대했고 황제에 대한 예를 갖추지 않았다. 조정 대신들이 그의 무례함을 들어 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청했으나 광무제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광무제와 함께 밤새 얘기를 나누다 임금의 침상에서 함께 잠이 들었는데 예전의 버릇대로 광무제의 배 위에 다리를 걸친 채 잤다. 太史가 글을 올려 ‘객성(客星)이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주 빠릅니다.(客星犯坐甚急)’고 하니, 유수가 “짐의 친구 엄광과 함께 누웠을 뿐이라네.(朕故人嚴光共臥耳)”라고 의론을 잠재웠다. 광무제가 그에게 간의대부(諫議大夫)의 벼슬을 내리자 엄광은 벼슬을 받지 않고 부춘산(富春山)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엄광이 은둔한 곳의 지명(地名)을 엄릉산(嚴陵山) 또는 엄릉뢰(嚴陵瀨)라 하며, 낚시질하던 곳을 엄릉조대(嚴陵釣臺)라 부르기도 한다.
다시 <동관관기(東觀灌記)>의 기록을 보면, “광무제와 엄자릉의 친분은 오래되었는데, 광무제가 왕위에 오르자 그가 보고 싶어졌다. 엄릉은 고정산(孤亭山)에 은거하여 고기낚는 일을 업으로 삼았는데, 사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그를 찿았다. 광무제가 삼공에 봉하려했으나 엄자릉은 받지 않았다.(光武帝與子陵友舊, 及登位望之, 陵隱于孤亭山垂釣爲業. 訪得之, 子陵不受封.)”고 하였다. 분명 엄자릉은 광무제의 관직을 피해 은거하여 낚시했던 것은 분명한 듯 하다.
지금도 절강성(浙江省) 동려현(桐廬縣) 성(城)의 서쪽 17Km 떨어진 부춘산(富春山)에 역시 엄자릉조대(嚴子陵釣臺)의 유적지가 있다. 부춘산은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기이함이 빼어나, 평소에 ‘아름다운 산과 빼어난 봉우리(錦峰秀嶺)’이란 명칭이 있다. 산앞에는 청계강(淸溪江)이 있는데, 강 옆에 ‘칠리뢰(七里瀨)’, 또는 ‘엄광뢰(嚴光瀨)’라 부르는 여울(瀨)이 있고, 여울의 동서에는 두 개의 고적(古跡)이 있는데, 동쪽이 엄자릉조어대(嚴子陵釣魚臺)이고, 서쪽은 사고대(謝翶臺)다. 강가에는 북송연간에 지은 엄자릉의 사당이 있다. 엄자릉이 은거하여 낚시한 고아한 풍모와 빛나는 절개는 고대 문인이나 은자의 찬양을 받았다.
사실 여기까지는 아름다운 미담(美談)이다. 그래서 당대(唐代) 시인 이백(李白)은 <독작청계강(獨酌淸溪江)>이란 시에서 “나는 술 한통을 가지고, 홀로 강조석(江祖石)에 올랐네. 천지가 열려서부터, 몇 천개의 바위가 다시 생겨났네. 술잔을 들어 하늘을 향해 웃으니, 하늘은 햇살을 서쪽으로 비쳐주는구나. (나는) 이 조어대(釣魚臺)에 올라 하늘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엄릉(嚴陵)은 낚시를 오랫동안 드리웠네. 산중인에게 말을 건네면 당신도 함께 어울릴 수 있을텐데.(我携一樽酒, 獨上江祖石. 自從天地開, 更長幾千石, 擧杯向天笑, 天回日西照. 永望坐此臺, 長垂嚴陵釣. 寄語山中人, 可與爾同調.)”라고, 그를 흠모하였다.
또한 당대(唐代) 황도(黃滔)도 시에서 “마침내 안개와 놀을 향해 농부가 되고, 하나의 낚싯대를 관복과 바꾸지 않네. 곧은 낚시바늘로 여전히 쫓으니 곰들이 일어나고, 오직 선생이 진정으로 고기를 낚누나.(終向煙霞作野夫, 一竿竹不換簪裾. 直鉤猶逐熊羆起, 獨是先生眞釣魚.)”라고 하여, 엄자릉의 낚시가 정치적인 술수나 공명을 초월한 진정한 낚시라고 추켜세웠다.
그런데 송대(宋代)에 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범중엄(范仲俺)이 <엄선생사당기(嚴先生祠堂記)>를 지었는데, 거기에 “대개 선생의 마음은 일월 위에 드러나고, 광무의 역량은 천지 밖을 감싸 안는다. 미미한 선생은 광무제의 커다란 업적을 이루지 못하고; 미미한 광무제가 어찌 선생의 높이까지 이를 수 있을까?(蓋先生之心, 出乎日月之上, 光武之量, 包乎天地之外. 微先生, 不能成光武之大; 微光武, 豈能遂先生之高哉.)”
또한“욕심많은 사람을 청렴하게 만들고 겁쟁이를 자립하게 만든다.(使貪夫廉, 懦夫立)”라고 하고, 결말에서 또 “구름덮힌 산은 무성하고, 강물은 끝없고, 선생의 풍모는 산처럼 높고 물처럼 길고.(雲山蒼蒼, 江水泱泱, 先生之風, 山高水長.)”라고 하여, 이 논쟁의 불씨를 지핀 것처럼 보인다. 이후 많은 문인들이 엄자릉의 일화를 사실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있으니...
옛 글에 “시비는 세속과 동떨어진 낚시터로는 찾아오지 않고, 영욕은 항상 권세 있는 사람을 따라다닌다.(是非不到釣魚處, 榮辱常隨騎馬人.)”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닌 모양이다. 낚시터가 시끌벅적한 듯 하니 말이다.
송대 대복고(戴復古)는 <조대(釣臺)>詩에서 “모든 일에 마음없는 낚싯대 하나, 삼공이라도 바꿀 수 없는 이 강산. 평생 유문숙(劉文叔: 한 광무제)을 잘못 알아, 헛된 명성 천하에 가득 드러내었네.(萬事無心一釣竿, 三公不換此江山. 平生誤識劉文叔, 惹起虛名滿世間.)”라고 하였고, 대복고(戴復古)의 종손(從孫) 대병(戴昺)도 “제왕에 즉위한 군왕이 옛 친구를 찾았네, 부춘강(富春江)의 남자는 다만 양가죽만을 입고, 낚시대 하나로 명성을 피해 갔건만, 어떻게 헛된 명성이 걸려들었나?(赤伏君王訪舊游, 富春男子只羊裘. 一竿本爲逃名去. 何意虛名上釣鉤.)”라고 했는데, 몇 가지 시사하는 점이 있다.
그것이 아마 당시 논란거리였던 모양인데, 즉 ´광무제를 잘못 알아 허명이 나게 되었고´, 본의 아니게 ´낚시에 헛된 명성이 걸려´, 지금까지 의견이 분분하게 되었다.
이 점을 앞의 사전에서 언급한 부분과 종합하여 본다면, 몇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첫째, 엄자릉은 광무제와 친구 사이로, 조정에서 함께 우의를 나눈 뒤 여러 의론이 일자, 갑자기 부춘산(富春山)으로 몸을 숨기고 낚시했던 일, 둘째, 낚시를 하러 가면서 양가죽을 입고 간 일 등이다. 어째서 광무제를 잘못 알았을까? 이점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면, 광무제는 왕망(王莽)을 멸망하고 새롭게 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주(周)의 서백(西伯)처럼 각처에서 인재를 구했을 것이다.
바로 그 시점에 엄자릉은 세 번이나 부름을 받은 끝에 조정에 불려갔고, 조정에서 광무제와 함께 지내며 옛날의 버릇이라지만 황제의 배에 발을 올린 일화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듯 하다. 말하자면 엄자릉측에서 황제를 시험해 본 것이다. 이를테면 예전대로 의기투합하여 백살까지 함께 행동할 수 있을지, 아니면 자신도 범려(范蠡)처럼 미리 자신의 몸을 보전하여 물러나야 하는지 등등을 알아봤을 것이다. 결과는 서로 어울릴 수 없기에, 홀연히 간의대부직을 버리고 부춘산으로 은거했던 것은 아닐까?
이것에 대해 왕안석(王安石)은 “한(漢) 조정에서 양가죽을 입은 사람을 찾으러 왔네, 묵묵히 말이 없다가 이윽고 옛날 낚시배를 타고 돌아왔네, 자취는 낚시터에 두고 마땅히 기다릴만 하네, 세상에 서백(西伯)이 없으니 산야에 머무를만 하고, 기구한 풍연(馮衍)은 재주가 마침내 끝나고, 영락한 환담(桓譚)은 무슨 일도 도모하지 못하네, 한 국자의 물엔 과연 철갑상어가 살 수가 없고, 몸을 창해에 두어야지 또 무엇을 구할까?(漢庭來見一羊裘, 黙黙俄歸舊釣舟. 迹似磻溪應有待, 世無西伯可能留. 崎嶇馮衍才終廢, 索莫桓譚道不謀, 勺水果非鱏鮪地, 放身滄海亦何求.)”라고 하였다. 역시 왕안석은 재상을 지낸 정치적인 재주를 가진 인물이어서 그런지 이런 각도로 해석하였는데, 마지막 구절에서 엄자릉과 동한(東漢)의 조정은 역시 서로 맞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두 번째 왜 세상을 버리려고 낚시하러 간 사람이 도롱이가 아니고 양가죽옷을 입고 갔을까? 청대(淸代) 원매(袁枚)는 ≪수원시화(隨園詩話)≫ 속에 엄자릉의 조대(釣臺)를 소제로 하여 쓴 詩를 인용하여, 詩에서, “양가죽옷을 한번 입고서 곧 마음이 생겨, 헛된 명성이 전송되어 지금에 이르렀네. 당초 도롱이를 입고 낚시하러 갔더라면, 안개와 물이 아득한데 어디서 그를 찾을꼬(一着羊裘便有心, 虛名傳頌到如今, 唐椒若着簑衣去, 煙水茫茫何處尋)”라고 했다. 그는 ´도롱이를 입었나´, ´양가죽옷을 입었나´하는 각도로써 엄릉이 명성에 마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판별했는데, 제법 괜찮은 발상인 것 같다. 애당초 도롱이를 입고 다른 낚시꾼들에 섞여서 낚시했더라면 아무런 표시가 나지 않아 그를 찾지 못했을 테고, 그랬다면 이러한 논쟁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점을 다시 생각해보면, 양가죽옷을 입고 낚시할 때는 은근히 조정에서 불러주기를 바랬을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조정에 부름을 받고 대사에 참가하려고 보니까 한(漢) 조정과 자신이 맞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말 진정한 낚시꾼으로 돌아온 것은 아닐까?
우리네 낚시꾼들이 그렇듯 엄자릉도 순진하고 조금 엉뚱했던 것 같다. 당대(唐代)사람 당언겸(唐彦謙)도 시에서, “엄자릉의 성격은 정말로 광적으로, 삼공을 건드리고 제왕에게 오만하게 군다. 옛 친구가 법을 어겼다고 화를 낼까 두려워하지 않고, 그가 제왕이 되었는데도 함부로 부른다.(嚴陵情性是眞狂, 抵觸三公傲帝王. 不怕舊交嗔僭越, 喚他侯覇作君房.)”고 했는데, 정말 엉뚱하지 않은가 말이다. 아무리 친구지간이지만 황제가 되었으면 황제로 대우를 해야 하고, 상황과 환경에 따라 처세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행동들은 황제의 속마음을 알아보려했다는 것 외에는 정상적인 해석을 하기가 어렵다. 청계강(淸谿江)을 굽어보는 엄자릉(嚴子陵) 조어대(釣魚臺)만이 진실을 알겠지...
엄자릉에 대한 평가는 강태공에 비하면 대부분 좋게 평가하고 있는 듯 하다. 특히 우리나라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도 “엄광은 성인의 도를 추구한 사람이다.”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같은 유가(儒家)의 입장이지만 집권자의 입장은 달랐다.
명 태조 주원장은 <엄광론(嚴光論)>에서 “옛날 한의 엄광(嚴光)은…조정에서 엄광과 주당(周黨)은 지극히 커다란 예로써 대우했지만 갑자기 떠난 것이다. 그리고선 바위나 물가에서 자고 스스로 즐기고, … 지금 낚시를 즐길 수 있는 것도 임금의 은혜다. 가령 당시 조정으로 초빙되었는데 명령을 거절하고 관직을 그만두고서, 이것을 버리고 마침내 사람의 쓰임을 쓸데없이 만들어, 천자의 덕과 재주가 부족하여 백성이 그 피해를 당하고, 세상이 황폐해져, 만약 그 결과가 이와 같다면 낚시를 즐길 수 있을 건가? 유유자적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했다. 입장에 따라, 시대에 따라, 평가가 이처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인생사 동전의 양면 같은 것 아니겠는가?
이후 엄자릉 고사는 여러 시에서 언급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원대(元代) 궁천정(宮天挺)이 지은 잡극(雜劇) 속에 엄자릉이 낚시한 고사를 전적으로 묘사한 이른바 <엄자릉수조칠리뢰(嚴子陵垂釣七里灘)>(≪고금잡극(古今雜劇)≫에 보임), 원대의 산곡작가 백무잠(白无昝)이 지은 <앵무곡(鸚鵡曲)>, 명대(明代) 종장(宗匠)의 <잡영(雜詠)․기생초(寄生草)> 등으로 작품화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