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제네시스 G90 3.3 터보, 대한민국 플래그십의 위엄
입력 2020.06.20 07:00
수정 2020.06.19 23:23
고급스런 뒷좌석, 흥미로운 앞좌석
5.0 가솔린과는 또 다른 매력
에쿠스, 제네시스 EQ900, G90은 세대를 거치며 오랜 기간 국내에서 생산되는 가장 비싸고 고급스런 자동차의 자리를 지켜왔다. 수억원짜리 수입 고급 세단과 비교하면 최대 1억원을 조금 넘는 G90은 가격적인 측면에서는 검소(?)하게까지 느껴지지만 감성품질 면에서는 결코 그들에게 밀리지 않는 대한민국 플래그십 세단의 위엄을 지닌 차다.
최근 제네시스 G90을 몰고 자유로와 올림픽대로, 서울시내도로 등을 시승했다. 시승 차량은 3.3 터보 가솔린 AWD(풀타임 4륜구동) 최상위 트림인 프레스티지 모델이었다.
젊은 시절엔 부모님의 비협조로, 나이 먹어서는 자꾸 어긋나는 로또 번호로 인해, 시승 기회가 아니었다면 평생 탈 일이 없을 차가 바로 제네시스 G90이다. 그만큼 이 차의 뒷좌석에 가족을 태울 때는 뿌듯한 기분이 든다.
에쿠스 시절 단순히 ‘크고 비싼 차’로만 여겨졌던 디자인은 제네시스 브랜드 출범과 함께 EQ900, G90을 거치면서 점점 ‘멋진 차’로 성장했다.
사실 G90은 EQ900의 페이스리프트(부분변경) 모델이지만 디자인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새 차로 탄생했다.
전면은 커다란 방패 모양의 오각 그릴이 대형 세단다운 웅장한 이미지를 만들어준다. 일단 크기가 국내 존재하는 어떤 세단보다 크고, 아래로 급격히 좁아지며 꼭짓점이 범퍼 하단까지 이어지는 파격적인 모습이다. 회사측은 이를 귀족 가문의 문장이라는 뜻에서 ‘크레스트 그릴’이라고 이름 붙였다.
헤드램프는 제네시스의 시그니쳐 디자인 요소인 쿼드램프가 적용됐다. 길게 수평으로 이어진 주간주행등을 경계로 한 쌍씩 상하로 나뉘어 고급스러우면서도 진보된 기술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전면 그릴과 헤드램프를 나누는 선에서 시작해 후드와 측면을 거쳐 후면까지 수평으로 이어지는 캐릭터 라인은 한층 안정적이고 묵직한 인상을 준다.
테일램프도 헤드램프와 마찬가지로 상하로 분리된 모습이다. 범퍼 하단의 듀얼 머플러는 납작하게 눌러놓은 5각형으로, 전면 그릴 형상과 통일성을 살리는 깨알 같은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전반적으로 클래식한 고급스러움과 미래지향적인 첨단의 이미지라는, 상식적으로 공존이 불가능할 것 같은 모습을 잘 녹여냈다.
귀빈을 모시는 고급 세단의 강점은 외부보다 내부, 특히 뒷좌석에 존재한다. 3160mm에 달하는 광활한 휠베이스(축거)는 뒷좌석에 충분한 레그룸을 할애해 넓고 안락한 착좌감을 제공한다.
뒷좌석 등받이도 전동시트로 조절돼 상황에 따라 최적의 자세를 만들 수 있으며, 앞좌석 조수석 포지션까지 뒷좌석에서 조절이 가능하다. 조수석 등받이를 접고 앞으로 밀어내면 항공기 비즈니스클래스 못지않은 편안한 자세를 취할 수 있다.
접이식 암레스트는 공조장치와 오디오, 앞좌석 뒤에 부착된 디스플레이 등을 조작하는 컨트롤러 역할을 겸한다.
5.0 프레스티지 모델의 암레스트는 고정식으로 뒷좌석 좌우 공간을 완전히 분리해버리지만, 이번에 시승한 3.3 터보 가솔린의 암레스트는 접이식이라 필요하다면 뒷좌석에 세 명이 앉을 수도 있다.
운전석도 최상급의 고급감과 편의성을 제공한다. 내비게이션은 12.3인치라는 엄청난 사이즈에도 불구하고 대시보드의 수평선을 침범하지 않고 잘 파묻혀 있으며, 화면을 분할해 지도 외에도 공조, 날씨, 스포츠, 나침반 등을 상시 표시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다.
고급 차종인 만큼 기능도 다양하지만 스위치 개수를 최소화하면서 수평으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G90은 기본적으로 쇼퍼드리븐(주인이 뒷좌석에 타는 차) 용도지만, 오너드리븐(주인이 직접 운전하는 차) 욕구도 충분히 충촉시켜 줄 만한 퍼포먼스도 제공한다.
터보차저로 출력과 토크를 한껏 끌어올린 V6 3.3 가솔린 터보 엔진은 이전에 시승했던 V8 G90 5.0 가솔린 자연흡기 엔진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갖고 있다.
3.3 터보 모델의 최고출력은 370마력으로 5.0 모델(425마력)보다 다소 떨어지지만 52.0kg·m에 달하는 최대토크는 6개의 실린더로도 8기통(53.0kg·m) 못지않은 퍼포먼스를 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순발력은 오히려 3.3 터보 모델이 5.0 모델보다 좀 더 앞서는 느낌이다. 5.0 모델이 잘 훈련된 준마 여러 마리를 매놓은 마차라면, 3.3 터보는 힘이 넘치는 야생마 한 마리를 달아놓은 듯 하다.
엔진음도 3.3 터보가 좀 더 야성적이다. 플래그십 세단의 특성상 엔진음을 상당부분 봉인시켜놓은 듯 하지만 주행모드를 스포츠모드로 설정하고 가속페달을 밟을 때의 사운드는 운전자를 흥분시키는 매력이 있다. 5.0 모델의 엔진음이 노련한 베이스파트 성악가의 중후한 음색이라면 3.3 터보는 혈기왕성한 테너의 힘이 넘치는 음색을 들려준다.
과거 동일한 엔진을 얹은 제네시스 G70을 몰아본 느낌이 남아있어 훨씬 덩치가 큰 G90에 달린 3.3 터보는 다소 실망스럽지 않을까 우려했으나 기우였다.
사실 공차중량 1.7t 짜리 G70에 3.3 터보 엔진은 다소 과도한 감이 없지 않았다. 트랙이 아닌, 도로교통법이 적용되는 도로에서는 힘을 한계까지 끌어내는 게 쉽지 않았다.
3.3 터보 엔진의 힘을 온전히 사용하기에는 오히려 2t을 훨씬 넘어가는 육중한 덩치의 G90이 적절하게 느껴진다.
헤비급이라 코너에서의 움직임이 둔할 것이라는 선입견도 가볍게 깨준다. 주행 상황에 따라 네 바퀴로 구동력을 적절히 배분해주는 AWD 시스템은 차체를 빠른 속도로 급회전 구간에 몰아넣어도 안정적인 자세를 유지해준다.
3.3 터보 후륜구동 모델과 AWD 모델의 가격차는 250만원인데, 이 차를 오롯이 뒷좌석에 사장님을 태우고 얌전히 돌아다니는 용도로만 사용할 게 아니라면 AWD 모델을 선택할 것을 추천한다.
이번에 시승한 G90 3.3 터보 가솔린 AWD 최상위 트림인 프레스티지 모델 가격은 1억1457만원으로, G90 중에서 가장 비싼 5.0 가솔린 모델(1억1957만원)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선택의 기준이 ‘취향’이지 ‘가격’은 아니란 의미다.
평소엔 뒷좌석에 앉아 다니더라도 가끔은 직접 몰고 나가 운전 재미를 느껴보고 싶다면 5.0 가솔린보다는 3.3 터보가 좋은 선택일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