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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원의 정치공학] '바닥 밑 지하실'…대북굴종 끝은 어디냐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입력 2020.06.15 07:00 수정 2020.06.15 08:34

적국 비위 맞추려 동맹국 모욕하고 관계 끊어

속고 또 속으면서도 동맹국 탓하며 굴종만 거듭

골수에 파고든 중증 '대북굴종'의 결말 두렵다

2018 남북정상회담 평양 이틀째인 19일 평양 옥류관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북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판문점회담 기념메달과 북미정상회담 기념주화를 선물하고 있다. 이 사진은 기사 본문 내의 특정 내용과 관련이 없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2018 남북정상회담 평양 이틀째인 19일 평양 옥류관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북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판문점회담 기념메달과 북미정상회담 기념주화를 선물하고 있다. 이 사진은 기사 본문 내의 특정 내용과 관련이 없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전국시대 초(楚)나라에 진(秦)나라 세객 장의(張儀)가 들어와 유세를 했다. 장의는 "초나라가 제(齊)나라와 맹약을 끊어버린다면, 진나라는 초나라와 서로 며느리를 맞아오고 딸을 시집 보내 영원히 형제의 나라가 될 것"이라며 "초나라와 진나라를 위해 이보다 더 좋은 계책은 없다"고 설득했다.


그동안 진나라가 여러 차례 도발해와 초나라는 제나라와 동맹을 맺고 대항하고 있었는데도 초회왕(楚懷王)은 이 말에 속았다. 제나라와 동맹을 끊고 진나라와 형제의 나라가 되겠다고 약속을 하고 혼자 그 약속을 지키고 앉아있었다.


장의가 돌아간지 한참인데도 진나라가 차일파일 약속 이행을 미루자, 초회왕은 "과인이 제나라와 관계 끊는 게 철저하지 못해 그러는 것일까"라고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에 제나라로 사신을 보내 면전에서 제나라를 모욕하도록 했다. 화가 난 제선왕(齊宣王)은 초나라와의 동맹을 파기했다.


초나라와 제나라의 동맹이 깨지자마자 진나라는 안하무인 격으로 초나라를 대했다. 결국 두 나라 사이에서는 전쟁이 터졌다. 제나라의 도움을 받을 길이 없는 초나라는 수만 명의 병사가 전쟁에서 죽고, 단양과 한중 땅을 빼앗겼다.


훗날 장의가 초나라에 또 왔다. 초회왕은 장의의 간계에 또 속았다. 초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이 "전에 속았으니 이번에는 장의를 삶아죽일 줄 알았다"며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또 요설을 듣는 것만은 안 된다"고 간언했으나, 초회왕은 "약속한 뒤에 배신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약속을 먼저 배신한 쪽이 어디인지, 옳고 그름과 판단의 기준이 모두 흔들리는 일이 동서고금에 다시 없을 줄 알았는데 과문했던 탓이었다. 바닥 밑에 또 지하실이 있는 것마냥 속고, 또 속고, 엉뚱한 동맹국을 탓하며, 정작 적국에는 자발적으로 굴종하는 태도가 2300년 만에 대한민국에서 보인다.


"우리민족끼리" 운운하는 말에 속아 9·19 남북군사합의라는 괴상한 약속을 맺었다. 적을 막아야 하는 최전방에 있던 GP(감시초소)는 우리 손으로 때려부수고, 우리 영공인데도 접경지역이라는 이유로 산불 진화 헬기마저도 띄우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정작 북한은 미사일도 쏘고 제 할 일을 다하고 있다. 북한이 미사일을 쐈는데도 문재인 대통령은 KBS와의 대담에서 남북군사합의 위반은 아니라고 극력 두둔했다. 귀순해온 탈북선원은 경찰특공대를 시켜 안대까지 씌워 판문점에서 강제북송했으며, 유럽 순방은 오롯이 대북제재 완화를 간청하는 기회로 썼다.


그런데도 북한은 점점 안하무인이다. 대북 정책이 뜻대로 되지 않자 엉뚱하게도 동맹국 미국이 문제인가 싶어 원망한다. 급기야 동맹국 대사로 간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는 말까지 했다. 미국은 아연실색해 "이미 수십 년 전에 선택하지 않았느냐"라고 반문했다. 면전에서의 모욕에 동맹은 위태로워졌다.


한미 간의 균열이 심해지자 대북 관계는 좋아지기는커녕 더욱 나빠지기만 한다. 평창동계올림픽 때 세객으로 왔던 김여정이 표변해 "대적행동 행사권을 군부에 넘겼다"고 무력도발을 협박한다.


이쯤 되면 정신을 차릴 줄 알았는데 '대북굴종'에는 끝이 없다. 상대방은 무력도발을 시사하는데 이쪽에서는 종전선언을 하자며 국회 결의안을 내는 세상이다. 민주당의 어떤 의원은 이 사태에 직면해 "우리 정부가 미국이 고수한 대북제재 압박의 틀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며 "결국 문제는 미국"이라고 또 동맹국 탓을 했다. 바닥인 줄 알았는데 그 밑에 지하실이 있는 꼴이다. 골수에 파고든 중증 '대북굴종'의 끝이 어디인지 알 길이 없다.


나라를 이끄는 이들의 오판은 국운의 쇠락을 가져온다. 동맹도 끊어지고 진나라에 이리저리 땅을 빼앗기며 초나라의 국력은 쇠약해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진나라는 초회왕을 또 속이려 들었다. 진소양왕(秦昭壤王)의 "무관에서 만나 이번에야말로 영구불변의 동맹을 하자"는 말에 초회왕이 또다시 속았다.


굴원은 "진나라는 호랑이와 이리 같은 나라다. 가지 마시라"고 만류했지만, 무관으로 향한 초회왕은 급기야 진나라에 사로잡혀버렸다. 이로부터 초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자, 굴원은 "온 세상이 모두 흐린데 나 혼자 맑으며, 뭇 사람이 모두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있어 이 지경이 됐다"며 강물에 몸을 던졌다.


속고, 얻어맞고, 그러다가도 저쪽이 표정만 조금 바꾸면 다시 반색을 해서 퍼주고, 또 속고 하는 와중에 동맹국과는 소원해지고, 우리 국민 중에는 탄식해 절망하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바닥 밑에 지하실이 거듭되듯 끝없이 펼쳐지는 굴종의 최종 결말이 무엇일지 2300년 만에 다시 한 번 확인해보는 일이 생길까 두렵다.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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