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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 방 사건'과 좋은 형사사법제도의 조건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0.03.26 08:00
수정 2020.03.26 05:01

형사사법의 목적은 범죄로부터의 사회 방위

'n번 방 사건' 유형의 신종 범죄 처벌할 형사법 규정 미비


텔레그램 메신저에서 '박사방'을 운영하며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을 협박하여 성 착취물을 제작 및 유포한 혐의로 구속된 조주빈의 검찰 송치가 진행된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종로경찰서 앞에서 분노한 시민들이 피켓을 들며 강력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2004년 프랑스 형사사법개혁법안 의회 제안연설에서 법무부장관 도미니끄 페르뱅은 좋은 형사사법제도의 조건으로 다음 4가지를 들었다. 형사사법제도는 그 시대를 반영해야 하고, 목적달성을 위해 적절한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신속해야 하고, 피해자를 적절히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검찰개혁 못지않게 형사사법개혁도 중요한 과제다. 근본적으로 변해버린 범죄환경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면서도 피의자와 피해자의 인권보호에도 더욱 충실한 제도를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형사사법개혁을 위해서는 먼저 형사사법의 존재이유와 목적을 근본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형사소송법 교과서는 형사소송의 목적을 실체적 진실발견과 적정절차의 원리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실체적 진실발견이 형사사법의 중요한 이념이자 목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최고의 이념과 가치는 아니다. 형사사법의 제1차 목적은 범죄로부터의 사회방위다. 피의자의 인권보호도 중요하지만 범죄로부터의 사회방위가 우선이다.


또한 형사사법은 효과적이어야 한다. 효과적이지 못하고 제도적 난맥상을 노출하는 형사사법은 어떤 고귀한 이념과 수사(修辭)에도 불구하고 좋은 제도가 될 수 없다. 세상이 변하고 사회가 변해 더 이상 몸에 맞지 않는데도 과거의 형사사법제도를 고집하는 것은 넌센스다. 수사기관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제도와 인적․물적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해외 서버 둔 IT 이용 범죄는 국제형사사법공조 중요
한국, 국제 '사이버범죄협약' 미가입 상태


텔레그램 'n번 방 사건'으로 온 사회가 충격에 빠졌다. 미성년자를 비롯한 70여명의 피해 여성을 성노예처럼 다룬 피해 동영상을 26만 명의 회원이 보면서 공유했고 운영자는 유료회원의 회비를 통해 거액의 불법 범죄수익까지 올린 전례가 없는 사건이다. 문제는 이런 새로운 유형의 범죄를 효과적으로 수사하고 처벌할 수 있는 형사법 규정이 완비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IT를 이용한 첨단범죄는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아 효과적 수사를 위해서는 국제형사사법공조가 매우 중요하다. 2001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체결되고 2004년 7월 1일 발효된 사이버범죄협약(부다페스트 협약)은 유럽평의회 47개 회원국과 미국, 일본, 호주 등 총 51개국이 가입되어 있으나 우리는 아직 가입하지 않고 있다. 협약 규정과 상충되는 통신비밀보호법, 정보통신망법, 개인정보보호법 규정 때문이다.


국제표준에 맞게 관련 법 규정을 전면적으로 정비해야 하는데 사이버범죄 협약이 발효된 지 15년이 지났지만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것이 IT 강국을 자처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우리의 형사사법제도가 국제조류에 따라가지 못하고 얼마나 후진적인지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법무부, 형사정책 총괄부서 없어
급변하는 첨단범죄에 정부 차원에서 발빠르게 대응해야


이에 대한 책임의 한가운데에 법무부가 있다. 경제정책이 재정경제부의 소관이듯 법무부는 국가정책으로서의 형사정책을 총괄하는 주무부서다. 금융경제범죄, 강력범죄, 성폭력범죄, 사이버범죄 등 주요범죄와 관련한 형사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검찰을 통해 집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법무부의 업무다. 그러나 법무부는 형사정책을 총괄하는 부서도 없고 형사정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조차 없다.


검찰국이 주무 부서지만 조직과 인원이 절대 부족하다. 검찰 관련 업무를 주로 함에 따라 정책부서로서의 역할은 전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형사정책연구원장을 지낸 박상기 전 장관조차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다. n번 방 사건에서 드러난 관련 형사정책의 미흡한 점을 신속히 입법적으로 보완하여야 할 추미애 장관도 엉뚱하게 n번 방 관련자들을 범죄단체조직죄로 엄단해야 한다며 법무부장관으로서의 책무를 망각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한비자는“일이 많은 시대에 살면서 일이 적던 시절의 그릇을 사용함은 슬기로운 사람의 대비책이 아니다”라고 했다. 프랑스는 2004년 형사사법개혁을 통해 한정된 형사사법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미국식 플리바게닝을 전면 도입하는 등 신속간이절차를 대폭 강화했다. 대신 대형금융경제범죄, 조직범죄 등 중대범죄에 수사역량과 자원을 집중하고 효과적인 수사를 위해 수사기관의 권한을 대폭 확대했다. 국가적 차원에서 범죄환경 변화에 적절히 대응한 좋은 사례다.


근본원인이 해결되지 않으면 문제는 반드시 재발된다. 제2, 제3의 n번 방 사건이 재발되지 않기 위해서는 범죄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구축할 수 있도록 법무부 형사정책의 현주소와 문제점을 검토해 조직과 기능 전반을 개혁해야 한다. 급변하는 첨단 범죄환경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가와 사회의 몫이다. 형사정책의 중요성에 대한 정부 차원의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


글/김종민 변호사. 전 광주지검 순천지청장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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