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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기업 정신의 상징 ‘발렌베리’

이석원 객원기자
입력 2019.10.20 06:00 수정 2019.10.19 21:47

<알쓸신잡-스웨덴 71>주식 40%, 총생산 30%, 총고용 30%

후계자 선정부터 수익의 사회 환원까지 그대로 스웨덴 정신

<알쓸신잡-스웨덴 71>주식 40%, 총생산 30%, 총고용 30%
후계자 선정부터 수익의 사회 환원까지 그대로 스웨덴 정신


발렌베리 그룹이 소유한 대표적인 중장비 업체인 스카니아 본사. (사진 = 이석원) 발렌베리 그룹이 소유한 대표적인 중장비 업체인 스카니아 본사. (사진 = 이석원)

스웨덴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대기업 중심의 산업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와 상당히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몇 개의 기업 가문, 즉 재벌이 스웨덴 산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발렌베리(Wallenberg) 가문이 존재한다.

발렌베리 가문이 이끄는 발렌베리 그룹은 스웨덴 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도 가장 큰 대기업 집단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기업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세계적인 가전 회사인 일렉트로룩스를 비롯해 통신 회사인 에릭손도 발렌베리 그룹의 소유다.

과거에는 자동차 회사였지만 지금은 가장 영향력 있는 방위 산업체인 사브도, 우리 땅에도 가장 흔하게 굴러다니는 덤프트럭과 버스, 트레일러를 비롯한 중장비 업체인 스카니아도 발렌베리 소속이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제약회사인 아스트라제네카도 이 그룹에 속해있다.

물론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스웨덴 최대 은행 그룹인 SEB와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공동의 국적 항공사인 스칸디나비아 항공(SAS), 그리고 북유럽 최대의 발전 설비 엔지니어링 회사인 ABB도 발렌베리 그룹에 속해 있는 대기업이다.

발렌베리 그룹의 주식시장 시가 총액은 스웨덴 전체의 40%를 차지하고, 각 기업의 총생산 규모는 스웨덴 총생산의 30%를 넘어서고 있다. 또 발렌베리 그룹에 속한 기업에서 근무하는 전체 종업원 수는 스웨덴 노동자의 30%를 차지할 정도다. 굳이 비교하자면 스웨덴에서의 발렌베리 그룹의 위상은 한국에서 삼성과 현대자동차를 합쳐놓은 것 만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발렌베리 가문은 한국의 재벌들과 엄연히 다른 기업 정신을 지니고 있다.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다’는 모토를 가지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는 제법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다.

살트쉐바덴에 있는 그랜드 호텔. 발렌베리 가문의 소유로, 스웨덴 모델로 불리는 살트쉐바덴 협약의 탄생지이다. (사진 = 이석원) 살트쉐바덴에 있는 그랜드 호텔. 발렌베리 가문의 소유로, 스웨덴 모델로 불리는 살트쉐바덴 협약의 탄생지이다. (사진 = 이석원)

우선 발렌베리 가문은 그룹 내 기업들의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 모든 기업들은 전문 경영인들을 두어 그들로 하여금 기업을 운영한다. 물론 각 기업들의 전문 경영인들을 선정하는데 가문이 중심이 된 발렌베리 재단이 관여하고 이를 통해서 경영권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세세한 기업 경영에는 발렌베리 가문이 직접 관여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런 기업 활동을 통해 얻어지는 기업의 이익 대부분은 발렌베리 재단을 통해 사회에 환원한다. 학교와 병원, 그리고 해외 구호 활동에 그 상당수가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발렌베리 재단은 유네스코와 유니세프, 유엔난민기구를 통해 국제 분쟁지역의 난민, 특히 어린이들에게 막대한 예산을 쓰고 있고, 유럽으로 유입되는 난민들을 돕는 일에도 적잖은 자금을 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기초과학 분야의 영재 양성에도 엄청난 투자를 한다. 대개의 기업들이 주로 응용과학 분야에 투자를 해서 실제 기업에 도움이 되는 인재를 양성하는데 반해 발렌베리는 기초 과학에 더 큰 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

기업 활동을 통한 수익금 중 실제 발렌베리 가문의 개인들에게 돌아가는 재산은 지극히 적은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서 그 규모나 금액을 알 수는 없지만.

가문이나 그룹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자격은 아주 독특한다.

1856년 1대 창업자인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 이후 현재 5대째 내려오는 후계자 자격의 가장 큰 원칙은 아무리 가문 내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적합한 후계자가 있을 경우’로 한정하고 있다. 적합하다는 것이 다분히 주관적일 수는 있지만 그래서 부수적인 규정을 명시했다.

우선 후계자는 국내외의 명문대를 스스로의 힘으로 졸업해야 한다. 학비든 생활비든 부모에 의존하는 경우 후계자의 자격이 없다. 또 스웨덴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해야 한다. 이는 아마도 창업자인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가 해군사관학교 출신의 해군 장교였던 데서 기인한 듯하다.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가 처음 시작한 기업은 SEB(Stockholm Enskilda Bank. 스톡홀름 엔실다 은행)다. 금융인 출신인 것이다. 발렌베리 가문은 초심인 금융업에 대한 중요성을 놓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후계자는 세계적 금융 중심지에서 실무 경험을 익혀야만 한다. 발렌베리 가문의 후계자들은 모두 뉴욕이나 런던의 금융가에서 실무 경험을 했다.

이런 식의 후계자 평가는 보통 10년 넘게 걸리며, 견제와 균형을 위해 2명을 뽑는다. 이렇게 선발된 두 명은 차례대로 산하 회사들의 경영진으로 참여하며 경영수업을 받다가 최종적으로는 그룹의 지주회사인 인베스터 AB와 그룹의 모태인 SEB의 전문 경영인으로 활동하다가 그룹의 후계자로 최종 발탁 되는 것이다.

발렌베리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깊은 아픔과 고통의 역사 속에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발렌베리 가문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표본으로 일컬어지는 라울 발렌베리. 예테보리에 있는 그의 기념비다. (사진 = 이석원) 발렌베리 가문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표본으로 일컬어지는 라울 발렌베리. 예테보리에 있는 그의 기념비다. (사진 = 이석원)

발렌베리 가문은 2차 세계 대전 때 나치에 협력했다는 오명을 가지고 있다. 2차 대전 때 발렌베리는 미국과 독일을 오가며 거래를 했는데, 당시 경영자인 야콥 발렌베리는 독일 기업인 보쉬의 미국 법인을 인수했다. 이게 독일과의 밀약에 의한 것이었다.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면서 미국 내 모든 독일 기업의 자산을 몰수했는데, 보쉬는 스웨덴 기업이라는 이유로 몰수를 피했던 것이다. 이른바 ‘보쉬 스캔들(Bosch Scandle)로 불린 이 사건의 배경이 나중에 밝혀지면서 발렌베리는 나치에 협력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발렌베리가 친나치 기업으로 낙인찍히지 않았던 것은 2차 대전 당시 가문의 일원인 외교관 라울 발렌베리 때문이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실제 모델로도 알려진 라울은 2차 대전 중 주헝가리 스웨덴 대사관에 근무하며 이른바 ‘보호 비자’라는 것을 만들어내 헝가리 내 수만 명의 유대인에게 주어 그들이 나치에게 잡혀가는 것을 막았다.

‘기업을 키우고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 기업이 그 사회에 진정한 선한 기여를 하는 것’이라는 스웨덴의 오래된 격언은 발렌베리 가문의 어제와 오늘의 역사 속에서 제대로 된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글/이석원 스웨덴 객원기자

이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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