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늑시> 한국형 느와르의 가능성
입력 2007.09.07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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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조연 연기자들의 투혼 연기
이준기 연기변신 돋보여
이준기의 연기변신이 돋보였던 MBC 수목드라마 <개와 늑대의 시간>이 지난 6일 방송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해질녘, 모든 사물이 붉게 물들고 저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친구(개)인지 적(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대’를 뜻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하 개늑시). 그 모호한 제목처럼 잃어버린 기억과 복수심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언더커버 요원의 이야기로 눈길을 끌었다.
시청률 면에서 ‘대박’은 아니었지만 <개늑시>는 국내에서 오랜만에 선보이는 ‘정통 액션 느와르’로 방영 내내 화제를 모으며 젊은 팬 층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사실 <개늑시>는 소재 특성과 이야기의 몰입도 면에서 드라마보다는 영화에 더 어울릴만한 작품이었다. 액션 느와르라는 장르에도 불구하고 방송 매체로서 어쩔 수 없는 표현 수위의 한계. 촉박한 제작일정으로 인한 후반부 극 전개와 액션 시퀀스의 완성도 저하는 지금도 아쉬운 부분이다.
엄밀히 말해 <개늑시>의 설정들은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복수극과 기억상실, 언더커버 요원, 원수지간의 악연으로 얽혀진 두 연인. 유사 부자 관계 등은 이미 기존 느와르 장르에서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장치들이다. <개늑시>에서 <무간도>와 <페이스 오프>, <메멘토>,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미지들이 파편적으로 스쳐지나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국내에서 정작 이런 정통 느와르를 소화해낸 작품이 거의 없었다는 희소성, ‘영화가 아닌 드라마’로서 열악한 제작여건 속에서 이만한 완성도의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오히려 평가해야 마땅하다.
기존 느와르 명장면의 ‘짜깁기’를 넘어서 <개늑시>만이 지닌 드라마로서의 흡인력은, 의미심장한 제목에서 연상되듯 ‘관계의 미학’을 제대로 살려냈다는데 있다. <개늑시>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서로 다중적인 관계로 엮어져있다.
기존 드라마는 선과 악, 적과 아군, 친구와 연인 같은 캐릭터의 상호 관계가 명확하다. 그러나 <개늑시>에서는 인물들의 관계가 대단히 복잡하고 모호하게 얽혀진다.
수현(이준기)에게 청방의 보스 마오(최재성)는 부모를 죽인 적이면서 한편으로 또 다른 정신적 아버지이기도 하다. 수현과 지우(남상미)는 연인이지만 공존할 수 없는 원수의 집안이다. 수연은 기억상실의 와중에 자신을 길러준 또 다른 양부(이기영)를 죽이게 되며, 친구이나 형제이던 민기(정경호)와도 적대관계가 된다.
이런 과정 속에서 기억상실과 위장요원, 엇갈린 우정과 사랑 같은 설정들이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인간사의 복잡 미묘한 애증관계를 복수극의 틀 안에서 설득력 있게 살려낸 것이 이 드라마의 매력이었다. 스스로도 자신이 수현인지 케이인지, 선인지 악인지, 모호한 정체성의 혼란에 놓인 주인공의 예측할 수 없는 선택과 가혹한 운명이 과연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지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당초 <개늑시>에서 가장 불안 요소였다면 역시 연기자들이었을 것이다. <왕의 남자>를 통해 깜짝 스타로 급부상했지만, ‘예쁜 남자’ 이상의 캐릭터를 벗어나지 못했던 이준기를 비롯하여 정경호, 남상미 등 비교적 연배가 젊고 곱상한 이미지의 배우들이 남성적이고 어두운 느낌의 느와르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아보였던 것도 사실.
그러나 <개와 늑대의 시간> 마지막 회까지 촉박한 제작일정과 위험한 액션 장면에도 불구하고 몸을 사리지 않은 배우들의 투혼, 최재성, 김갑수, 이기영 등 중견연기자들의 탄탄한 뒷받침은 자칫 가볍거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었던 드라마 구조에 극적인 중량감을 높여주었다.
특히 가혹한 운명 속에서 이중적인 정체성의 그늘을 안고 살아가야하는 수현/케이를 연기한 이준기는 단순한 남성적인 캐릭터로의 변화를 넘어서 자신의 배우인생에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될 만한 인상적인 열연을 보여줬다.
<메멘토>의 가이 피어스나 <무간도>의 양조위처럼 언뜻 드러나는 작은 디테일에서 복잡한 애증을 살려내는 내공은 아직 갖추지 못했을지언정, 단순히 감정을 단편적으로 내지르는 것을 넘어서 캐릭터를 자신의 틀에 맞게 소화해내는 완급조절에서는 한 단계 발전했다고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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