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액 계약금은 로또? 만만치 않은 프로의 벽
입력 2017.09.12 14:29
수정 2017.09.13 08:30
거액의 계약금 안겼지만 실패 사례 속출
고졸 최고 풍작은 SK 최정과 김광현
kt 강백호를 비롯해 내년 시즌 프로 무대에 뛰어들 2018 신인지명회의가 2차 지명을 끝으로 모두 마무리됐다.
이번 2차 지명에서는 대상 선수 954명(1차 지명 10명 제외) 중 10개 구단 10명씩 100명이 지명됐으며, 고졸 81명, 대졸 18명, 기타(해외복귀) 1명이 각각 부름을 받았다. 이제 이들은 1차 지명자들과 함께 구단과의 입단 협상을 거친 뒤 본격적인 담금질에 들어가게 된다.
야구계에서는 초, 중, 고 또는 대학을 거쳐 프로에 입단하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라 부른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한 해 100명이 넘는 선수들이 프로에 입단하는 만큼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방출 수순을 밟아야 한다.
어렵게 1군 무대에 올랐더라도 기존 주전 선수들과의 또 다른 경쟁이 기다리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을 이겨내야 리그를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로 발돋움할 수 있다. 즉,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확률을 통과한 이들만이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 곳이 바로 프로야구다.
신인지명회의를 통해 선발된 선수들 중에서도 희비가 엇갈리는 경우가 있다. 이른바 ‘싹수’가 보이는 선수들은 상위 라운드에 지명되는데 이들에 대한 기대치를 반영하는 것이 바로 계약금이다.
그러나 높은 계약금을 받고 입단했더라도 프로에서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야구라는 다른 구기 종목에 비해 잠재력을 평가하기가 무척 까다로운데 아무래도 ‘멘탈(정신력)’이 크게 좌우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신인 계약금은 90년대 초중반 대어급 대졸 신인들이 대거 등장하며 액수가 오르기 시작했고, 90년대 중후반 박찬호의 성공 이후 해외 진출 붐이 일자 아예 고졸 신인을 뽑는 기류가 형성되며 몸값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던 신인 계약금이 붙들린 이유는 2000년대 초중반부터다. 겁 없이 메이저리그에 도전장을 던졌다가 실패하는 사례가 속출하자 아마추어 선수들 사이에서는 불확실한 미국행보다 안정된 조건의 KBO리그를 택하는 분위기다.
KBO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계약금을 받았던 선수는 2006년 KIA에 입단한 한기주로 무려 10억 원을 받았다. 이듬해 LG 유니폼을 입은 봉중근도 드래프트를 거쳐 같은 액수를 받았으나 메이저리그 출신인 그를 신인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역대 신인들 중 5억 원 이상의 초대형 계약금을 받았던 선수들은 모두 20명으로 투수가 19명, 타자는 단 1명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들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5억 원 이상의 계약금을 받은 선수들 중 KBO리그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이는 손민한(1997년 롯데 1차 지명, 계약금 5억 원)으로 프로 15년간 통산 40.81의 WAR(대체선수대비 승리 기여도, 스탯티즈 기준)를 기록했다.
특히 고졸 신인의 경우 성공 사례를 찾기가 극히 드문데 2007년 SK에 1차 지명으로 입단한 김광현(5억 원)이 지난해까지 34.65의 WAR로 유일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선수로 기억된다.
2010년대 입단한 고액 계약금 신인들은 그야말로 흉작이다. 전면 드래프트였던 2011년 한화에 전체 1순위로 지명된 유창식(7억 원)은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고, 급기야 승부조작에 연루되며 프로를 떠났다. 2013년 6억 원을 받았지만 보여준 것이 전무한 NC 윤호솔(개명 전 윤형배)도 덧없는 시간만 흐르고 있다.
타자 쪽에서는 90년대 입단한 대졸 신인들이 단연 눈에 띈다. 김동주를 비롯해 이병규, 박재홍, 조인성, 진갑용 등은 모두 프로에 큰 획을 그은 레전드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계약금 형성 과정이 무척 흥미롭다.
90년대에는 서울을 연고로 한 LG와 OB(현 두산)의 경쟁, 프로에 발을 디디려는 실업야구 현대 피닉스의 등장으로 신인 확보에 엄청난 경쟁이 붙는다. 이들을 붙잡기 위해 계약금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것은 당연지사.
1993년 LG 이상훈이 2억원을 돌파한지 2년 만에 태평양 위재영(3억원), LG 심재학(2억 1000만원) 등 고액 계약금을 받은 선수들이 쏟아졌고, 이듬해부터 절정을 이룬다.
1996년은 '황금세대'인 92학번들이 대학을 졸업하는 해였다. 물론 진통도 만만치 않았다. 특급으로 분류되던 조성민과 임선동은 일본 야구를 택했고, 한양대 박찬호도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바람에 김이 새는 듯 했지만 박재홍이 야수 역사상 최고액인 4억 3000만 원을 기록하게 된다.
신인왕을 차지한 박재홍의 성공으로 고무되자 이듬해 LG는 이병규에게 1000만 원 높은 4억 4000만 원을, OB 역시 이에 질세라 1998년 김동주에게 다시 1000만 원을 높여줬다.
고졸 타자들 중 꽃길만 걸었던 선수는 사실상 2005년 SK에 입단한 최정뿐이다. 나란히 LG에 입단했던 박경수와 박병호는 유니폼을 바꿔 입은 뒤에야 잠재력이 터졌고, 타자에게 3억 원 이상 계약금을 안긴 현대와 KIA, 롯데는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