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유승민, 드라마 두 주인공의 같고도 다른 길
입력 2016.06.06 10:04
수정 2016.06.06 10:04
순망치한으로 불리던 김무성과 유승민
명예회복 다짐하는 두 사람 정치적 결말에 관심
순망치한 :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라는 뜻.(한 때 김무성 전 대표와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관계를 일컫던 말이기도 하다.)
20대 총선 새누리당 공천 과정에서 가장 뜨거웠던 인물은 단연 김 전 대표와 유 전 원내대표다. 당시 청와대는 원내대표 재임 시절 자신들과 대립각을 세웠던 유 전 원내대표를 내치려 했고 꿋꿋이 버티던 유 전 원내대표는 공천 마감시한 1시간 전까지 기다리자 결국 탈당, 무소속 출마를 선택했다.
이한구 전 공천관리위원장의 '공천 칼춤'을 지켜만 봐오던 김 전 대표는 유 전 원내대표만큼은 살리려 한 듯 대구 동을을 무공천 지역으로 결정하는 초강수를 뒀다. 그 과정에서 김 전 대표는 직인을 들고 부산으로 가 '옥새 파동'이라는 말이 탄생했다. 이후 직인은 들고 가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 파장이 없어지진 않았다.
김성태 새누리당 의원은 이 과정을 한 편의 '막장 드라마'로 표현했다. 김 전 대표의 측근인 김 의원은 2일 'TBS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총선 과정에서 (김 전 대표가) 당론으로 정한 국민공천제, 상향식 공천이 이렇게 무너지면서 국민들에게 막장 드라마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각자의 의도가 어찌됐든 김 전 대표와 유 전 원내대표는 '막장 드라마' 한 편의 주연 역할을 톡톡히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 내엔 이 외에도 또 다른 이슈 메이커들이 있었지만 김 전 대표와 유 전 원내대표가 화제의 중심에 선 것은 여권의 차기 대권을 거머쥘 후보군으로 분류돼 왔기 때문이다. 김 전 대표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겨루며 지속해서 상위권 그룹을 형성해왔고, 유 전 원내대표는 수치가 높진 않았지만 존재감 만큼은 뚜렷했다.
이들은 총선을 기점으로 더 치고 올라가려 했지만 당이 참패하면서 김 전 대표가 그 책임을 떠안아야 했고 유 전 원내대표와 함께 공천을 받지 못한 채 무소속으로 나섰던 몇몇 인사들이 줄줄이 낙선의 고배를 마시면서 유 전 원내대표 역시 생채기를 입었다.
총선의 여운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20대 의원이라는 직함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스스로에게 심폐소생술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원박(원조 박근혜계)'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가 현 정권 들어 '멀박(멀어진 박근혜계)'이 됐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이들의 미래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너무 관계가 멀었고 소원했다", "청와대 얼라들이 합니까"
김 전 대표와 유 전 원내대표는 2005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시절 각각 주요 당직을 맡은 공통 기억이 있다. 김 전 대표는 사무총장으로, 유 전 원내대표는 비서실장으로 근무했다. 당시엔 현재 이들이 박 대통령과 지금 처럼의 거리를 두게 될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 전 대표는 지난해 11월 유 전 원내대표의 부친인 유수호 전 의원의 빈소에서 유 전 원내대표와 한선교 의원을 지칭하며 "요래, 요래 박 대통령을 위해 참 열심히 했는데…"라며 쓴웃음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이들은 2012년 대선 때에도 박근혜 후보를 위해 힘썼으나 정권 출범 이후 박 대통령과 점차 멀어졌다. 김 전 대표는 2014년 전당대회에 나서면서 '친박 좌장' 서청원 의원과 맞서 당선됐고 취임 일성으로는 "청와대에 할 말은 하겠다"고 하면서 시작부터 정권과 엇박자를 냈다.
임기 도중 몇 번 청와대와 맞서기도 했다. 2014년 말 "정기국회 이후 개헌에 대한 논의가 봇물이 터져 막을 길이 없을 것"이라고 했고 2015년 5월 국회법 개정안을 두고 당청 간 이견이 있을 때에도 "강제성이 없다. 위헌이 아니다"라고 청와대의 반대편에 섰다. 2016년 2월엔 "친박 핵심으로부터 현역 40여명 물갈이 명단있다고 받았다"고 친박계를 저격하기도 했다.
얼마 못 가 입장을 바꾸긴 했지만 재임 기간 동안 비박계의 수장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던 그는 최근 서울 모 음식점에서 비박계 의원들과 가진 만찬 회동에서 "대표를 하면서 박 대통령과 제대로 독대하면서 얘기한 적이 없다. 대통령과 관계가 껄끄러웠다. 너무 관계가 멀었고 소원했다"고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상 박 대통령과의 관계에 있어서 돌아오지 못 한 강을 건넌 것으로 풀이된다.
유 전 원내대표 역시 이 정권 들어서 박 대통령과 등을 진 모양새다. '청와대 얼라(어린아이 의미의 방언)' 발언은 유명하다. 지난 2014년 10월 외교통일위원회 소속이던 그는 외통위 국감에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향해 "이거 누가 하는 겁니까. 청와대 얼라(어린아이 의미의 방언)들이 하는 겁니까"라며 정부를 비판했다.
당시 박 대통령이 유엔 총회 방문 기간 중 사전에 발언자료로 배포됐다가 취소된 '중국 경도론'과 관한 이야기였는데 듣기에 따라서 청와대를 하대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이후 2015년 2월 2일 원내대표에 당선돼 7월 8일까지 5개월 간 '복지 정책', '개헌', '인사', '국방 정책' 등 다양한 문제에서 어긋났고 '국회법 개정안 파동'을 겪으며 결국 직을 내려놨다.
비슷한 길 걸어온 김무성-유승민, 결말은?
김 전 대표와 유 전 원내대표는 때로는 함께 때로는 달리하며 대동소이한 행보를 보였다. 2014년 전대 때 유 전 원내대표가 서청원 의원을 지지하며 김 전 대표와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그 해 11월 두 사람은 여의도에서 곰탕 회동을 가졌고 다시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김 전 대표는 자신보다 7살 어린 유 전 원내대표를 존중하면서도 친근한 동생 처럼 편안하게 대했다. 비공식석상에서는 '승민이'라고 편하게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이들의 관계는 '순망치한'이라는 한자어로 표현될 만큼 가까웠다.
정윤회 문건 논란이 한창이던 2015년 1월에는 '문건파동 배후는 K(김무성)-Y(유승민)'라고 적힌 수첩 메모가 공개됐고 일각에선 이를 두고 이들이 더욱 끈끈해지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국회법 개정안 파동 당시 처음에는 유 전 원내대표를 감싸던 김 전 대표가 끝에는 사퇴를 종용하며 다시 멀어진 것이 아니냐는 설이 흘렀다.
어찌 됐든 두 사람은 과거와 영광과 상처를 뒤로 하고 현재 20대 의원으로서의 역할을 시작함과 동시에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사실상 내년 대권을 위한 포석이란 분석이다. 김 전 대표는 최근 몇 번 측근과 '식사 회동'을 거치며 다시 주목을 받고 있으며 김 전 대표 측근들이 참여하는 '미래혁신포럼'도 눈길을 끈다.
총선 이후 잠행해 온 유 전 원내대표도 대학 강연을 통해 정치 행보를 시작했다. 지난달 31일 성균관대에서 '경제위기와 정치의 역할'을 주제로 강단에 선 그는 "헌법 가치를 지키는 게 진정한 보수"라며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읽지 말자. 총체적인 국가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치권에서는 두 사람의 움직임을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출마설에 자극을 받은 잠룡의 모습으로 평가하고 있다.
조금 뒤처진 상태에서 출발하는 두 사람 모두 분발하고 있지만 김 전 대표가 조금 더 반등의 기회를 잡을 가능성이 큰 상황으로 보인다. 지난달 24일 김 전 대표는 정진석 원내대표의 부름에 응해 최경환 의원까지 포함된 3인 조찬 회동으로 조용하지만 강렬한 복귀식을 치렀다. 지금 당장 예전의 명성을 찾기는 힘들지만 김학용·김성태 의원을 중심으로 한 자신의 세력이 있다는 것은 다시 상한가를 칠 수 있는 주 요인이다.
반면 유 전 원내대표는 조해진·류성걸·권은희 등 19대 국회에서 자신과 가까이 지냈던 인사들이 20대 문턱을 넘지 못 해 세력 구축이 굉장히 곤란해진 상황이다. 새누리당을 떠날 마음이 거의 없는 그에겐 복당 문제도 걸림돌이다. 친박계가 여전히 당의 주도권을 쥐고 있어 연내 복당이 어렵다는 시각이 많고 실제로 그렇게 될 경우 대권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