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카카오톡
블로그
페이스북
X
주소복사

북 외국인 최장기수 케네스 배 "수감시설 죄수, 나 혼자"

목용재 기자
입력 2016.06.01 14:44
수정 2016.06.01 15:21

북한 억류기 '잊지 않았다' 출판 기자회견

"선교 영상, 자료 담긴 이동식 하드드라이버 문제로 억류"

735일동안의 북한 억류기를 담은 선교사 케네스 배 씨의 '잊지 않았다' 출간 기자간담회가 1일 온누리교회에서 개최됐다.ⓒ출판사 두란노

지난 2012년 말 북한에 의해 억류, 외국인으로서는 최장기간인 735일 동안 북한 외국인 특별교화소에 수감돼 있던 선교사 케네스 배 씨가 "나는 그곳의 유일한 죄수였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 했다.

735일 동안의 북한 억류기와 자신의 신앙에 대한 책인 '잊지 않았다(두란노)'의 출판기념 기자회견에서 배 씨는 "북한에서 억류된 이후 4개월 반정도의 예심 과정을 거쳐 재판을 받은 후 노동교화형 15년을 선고받았다"면서 "그 이후 외국인 특별 교화소로 옮겨졌는데 제가 그곳에서 유일하게 감금된 죄수였다"고 밝혔다.

배 씨에 따르면 이 특별교화소는 30여명의 북한인이 시설을 관리하고 있었고 그곳에 죄수는 배 씨 단 한명뿐이었다.

이곳에서 배씨는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하루 10시간여 동안 강도 높은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일주일에 6일을 강제노역을 했다는 증언이다. 그는 콩을 심는 등의 농사와 관련된 노역, 하천의 돌이나 석탄을 운반하거나 땅파기, 도랑을 메꾸거나 파는 등의 일에 동원됐다.

일하는 강도에 비해 특별교화소에서 제공되는 음식이 부실해 결국 영양실조로 이어졌고 이 때문에 평양의 외국인 전용 병원인 '친선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았다.

배 씨는 "강제노역에 두세달 동안 동원되다 보니 결국 체중이 27kg이 빠졌고 영양실조에 걸렸다"면서 "그래서 평양친선병원으로 후송됐는데 치료를 받으며 괜찮은 음식을 제공받았다. 교화소 안에서는 식사가 부족했고 또 노동 강도가 심해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고 증언했다.

지난 2013년 7월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는 당시 배 씨의 근황을 전하면서 '특별교화소'의 내부 시설까지 공개한 바 있다. 특별교화소는 북한 주민들에게조차 생소한 시설로 일종의 '전시용 감옥'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조선신보는 특별교화소에 대해 "일반 범죄자가 아닌 반국가범죄를 저지를 외국인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시설"이라고 짧게 언급한 바 있다.

특별교화소는 십수명의 수감자가 비좁은 방에서 포개져 잠을 자야하는 북한의 일반 교화시설보다 쾌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신보가 공개한 사진에도 선풍기와 침대, 침구류, 옷장, 책상 등이 배치돼 있었다. 이 시설은 외부인들에게 탐방용으로 공개하는 '선전용' 시설로 알려져 있다.

아울러 배 씨는 당시 자신이 북한에 억류된 이유에 대해서는 "반입해 들어갔던 이동식 하드드라이버에 내셔널지오그래피에서 만든 북한 취재 영상이 포함돼 있었으며 6년동안 북한 및 중국에서 사역했던 사역보고서, 선교 편지, 각종 자료 및 동영상이 포함돼 있어 문제가 됐다"면서 "원래 외부자료는 갖고 들어가지 않는 것이 철칙이었는데 당시 실수로 그것을 가지고 들어갔다"고 밝혔다.

배 씨는 북한 억류 전까지 17차례 북한을 오고가며 여행사업을 벌인 사업가였지만 그 와중에 한 선교단체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중국에 대북선교활동과 관련된 기지 구축작업을 진행해왔다. 배 씨가 2010년부터 여행사업을 진행한 이유도 북한을 방문하면서 직접 주민들과 접촉하면서 북한의 실상을 보여주면서 북한의 닫힌 문을 열고자하는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18번째 방문에서 실수로 반입한 물건이 문제가 된 것이었다.

배 씨는 "이미 수차례 방북했고 (북한) 정부 관계자들과도 안면이 있을 정도로 익순한 곳이었지만 하루아침에 북한 당국을 위협하는 반역죄라는 명목으로 15년 노동교화형을 받게 됐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지난 2012년 12월 12일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한 날을 기점으로 "집으로 돌아가기 어렵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배 씨는 "북한에서 억류됐던 시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은 2012년 12월 12일 광명성 3호를 발사한 날이었다"면서 "당시만해도 곧 돌아가겠지라는 생각으로 평양으로 이송돼 있었는데 그날 미사일 발사를 통해 내 기대가 산산히 깨지는 일을 겪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억류 전 평양의 칠골교회를 방문했던 일화도 소개했다.

그는 "그곳의 예배가 생각보다 남한과 흡사했다. 찬양가를 불렀고 목사의 설교도 있었고 중간중간에 '아멘'이라는 소리도 들렸다"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지만 진정한 예배는 아니었다. 설교도 성경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김일성 찬양과 남하 비방으로 마무리해버렸다"고 말했다.

목용재 기자 (morkka@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댓글 0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