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포트라이트'와 '신경숙 고발 칼럼'의 혁명
입력 2016.03.07 10:41
수정 2016.03.07 11:05
<김헌식의 문화 꼬기> 우리 사회 진일보를 부르는 외침들
대체적으로 대중 영화에서는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되기 일쑤이다. 영화 '베테랑', '암살', '내부자들'같은 한국 영화 흥행작들은 더할 나위 없다. 선과 악이 명확하게 갈려야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의 몰입과 흥미는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현실과 매우 다를 수 있다. 현실에서 선과 악은 뒤엉켜 있고, 그것을 구분해 내는 것은 쉽지도 재미가 있지도 않다. 그런 현실을 다룬 영화들은 대중적 흥행은 열세여도 작품상을 받기 쉽다.
영화 '스포트라이트'도 그런 영화 가운데 하나가 되있다. 이 영화는 201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았지만, 개봉관은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영화는 폭로를 내용 컨셉으로 삼고 있지만, 선과 악의 구도로 가지 않았다.
영화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는데 성직자들의 성추행과 성폭행이 만연할 수 있었던 것은 선한 행동 때문이었다. 대주교는 성당 안의 추문이 밖으로 알려질 경우, 일어나게 될 권위 추락을 염려했다. 보스턴의 변호사를 포함한 유력 인사들도 지역 사회를 위하는 길이라며 성직자들의 추문을 모른 체 했다. 오히려 그들을 은폐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언론들은 제대로 다루지 않았고, 성당이라는 거대한 거인 앞에 무력했다. 그들도 결국에는 성당의 추문을 덮는 것이 여러모로 옳은 일이라고 여겼다.
한 번 덮기 시작한 추문은 끝이 없었다. 오히려 문제를 일으킨 성직자들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 오히려 더 활개를 치는 모양새였다. 그 사이 수많은 피해자들이 양산되었고, 공론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숨길 수 밖에 없었다. 성당은 여전히 많은 아이들이 찾는 공간이었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 같은 일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한 가운데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은 보스턴 글로브의 신임 편집장이었다. 그는 그 지역 출신도 아니었고, 해당 종교인도 아니었다. 그러한 면에서 객관적인 시각과 판단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 점 때문에 오히려 배척의 시선이 가해지기도 했다.
그는 그런 상황 속에서 성직자 성범죄에 대한 취재를 허용한다. 영화는 우여곡절 끝에 이뤄진 취재 과정을 긴밀하게 담아낸다. 같은 현상을 두고 각자의 입장에 따라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이 달라지는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한 사례가 있었다. 지난해 신경숙 표절 논란이 터졌다. 그것은 우연히 한 소설가가 인터넷에 쓴 칼럼에서 비롯했다. 만약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에 빠져 버렸고, 그 소설가는 이후 엄청난 후폭풍과 온갖 비난에 시달렸다.
물론 그러한 비난을 가하는 이들은 한국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신경숙 표절 논란은 꽤 오래된 사안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10여년 이상 이를 문학 권력들은 외면했다. 어느새 신경숙은 문단의 홍보와 세일즈를 통해 수백억을 몰아주는 스타 작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형 출판사들은 이 수백억짜리 작가의 작품을 돌아가면서 출판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표절 시비는 악재였기 때문에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문제였다. 다른 문학 작품이었다면 바로 제기되었을 사안이었지만, 무시된 것은 역시 대마불사의 불문율이었다. 큰 작가일수록 건드릴 수 없는 데 그것은 한국문학의 중심이기 때문이라는 명분보다는 돈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얼마전 문단의 큰 중심축이었던 한 대형출판사는 창립 기념식에서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잘한 것 가운데 하나는 작년 한 해 동안 신경숙 표절 논란을 잘 견뎌낸 것이라고 했다. 그는 신경숙 표절 논란이 시비거는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그같은 일련의 행동들은 어떻게 보면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 그렇게 했던 것이겠다.
더구나 한국문학이 어렵고, 출판 불황이 있는 상황 속에서 신경숙을 건드리는 것은 엄청난 일이 될 것이었다. 한국 문학의 붕괴라고 할 듯 싶었다. 어쨌든 많은 언론들은 이러한 구조에 대해서 들여다보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난 논란만 몇번 다루다가 말았다. 왜냐하면 직간접적으로 다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외에 진출해 한국을 대표하고 있는 작가에 국내 굴지의 출판사는 물론 독자들도 엄청 거느리고있다. 어쨌든 선과 악이라는 관점에서 명확하게 가를 수는 없을 지라도 분명 잘못은 있었다.
만약, 한국에도 독립적인 스포트라이트 팀이 있었다면 그렇게 다루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문학 권력에만 한정된 일은 아니다. 수많은 사안들이 이렇게 엉켜 있다. 그 안에서 각자의 명분에 충실하다.
그 명분은 겉과 달리 다른 속내가 있기도 하다. 조직이나 사회를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 그것은 그런 목적에 부합하지 못하고 만다. 더욱 건강함을 해치고 부작용을 양산할 뿐이다. 명분에 기대어 음습함을 용인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곰팡이가 피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를 단절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시선으로 객관적인 접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것이 그래도 미국 언론이 그리고 선진국 저널리즘이 살아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이 아니라 그 사이를 넘나들어 가면서 어두운 그늘을 합리화하는 이들을 드러내주는 역할은 언제나 필요하다. 그것이 영화 '스포트라이트'가 우리 사회에 특히 전해주는 함의점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선과 악의 관점으로 보면 보이지 않는다. 선 속에 악이 있고 악 속에 선이 있는 경우도 있다. 각자 열심히 한다는 것만으로 합리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렵기도 하지만, 그 어려운 일을 간단하게 규정, 치부하지 말고 대해야 한다. 그러한 작업들이 영화와 드라마 소설에서 많이 다뤄질 때, 우리 사회는 한층 더 진일보 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