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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부터 지식인 무리까지 도시 파괴에 몰두하는 이유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15.09.12 10:29
수정 2015.09.12 10:30

<굿소사이어티 서평>정치생태주의 아닌 정치화한 생태주의의 폐해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유현준 지음 을유문화사 펴냄
적금 타 주택자금 마련되면, 을랑이 엄마
내다버린 생각들을 다시 챙겨
메추리가 뒤란으로 기어드는 산골마을
곱게 깔린 노을 아래로 가자
가서, 솔가지 지펴 저녁연기 올리며 살자
집 둘레엔 듬성듬성 탱자나무 심어 울타리를 치고
빨래가 재주넘는 나일론줄도 달아보지 않으련?

-김영남의 시 ‘초향(草鄕)’ 앞부분


1990년대 말 일간지 문화면에 소개됐던 시작품 하나를 오려서 수첩에 넣고 다녔다. 틈나면 꺼내 읽다가 어느덧 외워버린 게 이 작품이다. 시인이 그리 유명한 분이 아니고, 시 역시 시사(詩史)에 남을만한 걸출한 작품이라고 할 순 없다. 하지만 이 시인이 시어(詩語)을 매만지는 솜씨가 남다른데다, 내용도 우리의 귀소본능을 자극해서인지 심금을 울린다. 필자인 내가 시골 출신이라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메추리가 뒤란으로 기어드는 산골마을/곱게 깔린 노을 아래”로 가서 “솔가지 지펴 저녁연기 올리며 살자”는 식의 소리를 들으면 바로 무장해제되고 흐물흐물해진다. 그건 누구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반세기 전까지 한국인 대부분은 시골에 거주했으니 지금도 그런 정서는 매우 익숙하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의 필자인 나는 확 달라졌다.

출판계 휩쓰는 ‘정치화한 생태주의’

요즘은 김영남의 시를 잘 읽지 않으며, 시골생활에 대한 꿈도 접었다. 사람이 좀 둔감해진 탓일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결정적 이유는 따로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우리시대 유행 품목으로 등장한 ‘정치화한 생태주의’에 질렸기 때문이다. 왜곡되고, 정치화된 생태주의에는 어설픈 센티멘탈리즘이나 허위의식이 깔려있는 건 물론 때론 아주 음험한 정치적 목적까지 깔려있다는 걸 눈치챘다.

사실 ‘꿈에 본 내 고향’ 등 흘러간 대중가요에서 제아무리 고향타령을 반복하고, “나는야 흙에 살리라”고 목이 터져라 다짐해도 그건 위안으로서의 노래에 불과하다. 그 결과 “느리게 사는 삶”, “어머니 대지(大地)” 어쩌고 하는 생태주의 단골 용어 따위로부터 거리를 두고 살기로 했다. 요즘의 나는 헨리 데이빗 소로의 '월든'이나, 노장(老莊)사상을 희롱하며 그걸 세상과 현실에 대한 교묘한 공격으로 활용하는 무리를 살짝 경멸하는 편이다.

인문학 애호가를 자처하는 저들 집단은 의외로 지식-정보를 오염시키는 수상한 집단일 수 있다. 서울시장 박원순 식의 어설픈 생태주의는 바로 이런 잘못된 풍토에서 등장한다. 즉 도시에 살면서 시골을 동경하던, ‘몸 따로 마음 따로’의 이중구조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건 시인 김영남 류의 낭만적 취향을 넘어 “도시를 파괴하려는 좌익정치가의 음험한 장난”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호된 비판은 한국경제신문 주필 정규재의 책 '닥치고 진실'에 나오는데, 인구 1000만 명의 행정을 책임진 박원순은 도시의 복잡성과 고도화된 분업구조 자체를 모른다. 특단의 조치가 없다면 그게 앞으로 그게 두고두고 서울의 우환덩어리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이런 나만의 우려를 재확인해준 불길한 책이 유현준 홍익대 건축대 교수가 쓴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을유문화사)이다.

건축학과 교수가 쓴 썩 위험한 도시론

몇 개월 전 신간이 나온 뒤 2개월 새 6쇄를 찍었다. 요즘 출판시장 분위기에서 중박을 넘어 대박 수준인데, 나름 ‘미디어의 마사지’를 받았다. 꽤 많은 일간지 리뷰가 있었고, 직후 KBS ‘TV, 책을 보다’의 전파도 탔다. 그럼 통념상 ‘좋은 책’일 텐데, 읽어본 이 책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저자에겐 미안한 지적이지만 이 책은 대강 그렇고 그런 도시건축에 관한 재탕 얘기일 뿐이다. 독창적이지도 않고 참 재미도 없다.

그럼 요란했던 서평에 TV 노출이란 뭐였지? 그런 의문이 절로 나오는 판인데, 책 껍데기만을 보고 떠들었던 서평에 TV 토론과 달리 이 책은 ‘되다 만 책’인데, 내용이란 것도 여기저기에 썼던 기존 원고를 긁어 모았다. 도시와 건축 이야기야말로 훌륭한 읽을거리가 쏟아질 흥미진진한 영역인데, 이러면 결국은 독자에게 민폐를 끼친다.

이를테면 이런 소제목이나 장(章)제목을 보라. ‘강남거리는 왜 걷기 싫을까?’, ‘강북의 도로는 왜 구불구불한가: 포도주 같은 건축’, ‘죽은 아파트의 사회’…. 당신에겐 이런 내용이 감동적인가? 나는 하품이 나온다. 그에 따르면 강남 테헤란로는 성공적인 거리이지만, 걷고 싶진 않다. 그러려면 적절한 휴먼 스케일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그게 없는 탓이란다. 원 세상, 이렇게 진부한 소리라니!

아니나 다를까? 층층이 퇴적된 삶의 역사도 없으니 그래서 도시는 삭막하다는 말이 반복되는데, 이 책이 재미없는 건 바탕에 깔려있는 이런 도시 혐오의 정서 탓이다. 실은 국내 출판물 중 열에 아홉이 그렇다. 즉 도시를 말하면서도 옛 가요‘나는야 흙에 살리라’라는 식의 자연친화-농촌 취향을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이 책엔 ‘죽은 아파트의 사회’ 같은 소제목이 등장한다. 즉 아파트는 거대한 흉물이다. 그게 맞는 소리일까? 얼마 전 세계적 건축가가 서울에 왔는데, 그가 한국 건축가들과의 미팅 때“모던하면서도 한국적 정체성을 가진 건축물이 뭡니까?”라고 물었다. 누구도 답을 못했다. 멋지면서도 한국적인 건축물이란 없다는 자괴(自愧)혹은 엽전의식이 발동한 탓이리라.

그때 자리에 참석했던 교수 한 명이 학교 강의 때 같은 질문을 던졌다. 한 학생이“아파트죠 뭐”하고 쉽게 답했다. 와 웃음이 터졌지만 그게 정답이다.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아파트는 우리 문화다. 비판론자들은 아파트에 살면 이웃관계가 단절된다고 하지만, 바탕에는 이웃사촌 이데올로기가 깔려있다. 이웃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근대 이전 공동체의 관념이 맹렬히 작동하는 것이다. 그렇게 접근해선 도시란 설명 불가능한 괴물이 된다.

한국인의 80%가 사는 도시를 외면한 건 거대한 위선

쉽게 말하자. 이웃의 시선이란 불편할 수도 있다. 한국인의 80% 이상이 도시에 사는데, 그건 도시의 쿨한 매력에 끌렸다는 얘기다. 명백한 그 사실을 외면하면 대중을 속여먹기엔 좋겠지만, 끝내 위선으로 발전한다. 심할 경우 칼 마르크스의 소외론 같은 아카데믹한 거짓말로 치닫는다. 왕왕 생태주의 이념에서 헛된 위로를 구하기도 한다.

그런 게 바로 ‘왕촌티’다. 그런 촌티를 벗어 던진 최고의 읽을거리를 기회에 소개하고 싶다. 그게 서울대 전상인 교수의 몇 해 전 책 '아파트에 미치다'(이숲)이다. 그에 따르면, 아파트야말로 오늘의 한국, 한국인을 말해주는 의미의 황금어장이다. 이를테면 아파트 인구가 52.7%(2007년 기준)로 세계 최고다. 일본이 20%대라는 걸 염두에 둬보라. 놀랍게도 도시론, 건축론이란 대부분이 이 엄연한 현실을 부정하며 멀리 떨어진 자연을 그리워하는 헛된 타령이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그 전형이다. 그래서 이 책은 도시를 모르는 저자가 쓴 되다만 도시론이다. 그럼 도시란 무엇인가? 상식이지만, 도시는 혁신과 진화가 극적으로 이뤄지는 곳이며, 그래서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다. 도시의 전체 모습을 보지 못하면, 더럽고 복잡하며 반환경적인 구석만 눈에 들어온다. 그런 시각을 학문의 이름으로 포장해보니 태반이 지적 센티멘탈리즘에 빠진다.

그래서 이 책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엔 건축론, 도시공학을 들먹이지만, 그럴싸한 아카데믹한 거짓말에 속한다. 박원순 시장같은 좌파 정치인에서, 도시가 뭔지도 모르고 도시론을 끄적이는 먹물들까지 몽땅 도시파괴에 열중한다. 안타깝다. 그게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글/조우석 문화평론가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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