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운송 "캐리어만 보상 가능하고 내용물은 글쎄..."
입력 2015.07.14 11:02
수정 2015.07.14 17:26
항공운송서비스 관련 피해 민원 해마다 급증
약관에 항공사 면책사항 많아…소비자에게 책임 전가
국토부, 올 들어서야 TF팀 구성해 개선방안 마련 중
#최근 직장인 이 모씨(33·남)는 회사 출장을 위해 인천공항에서 이탈리아 밀라노까지 국내 A항공사를 이용했다. 하지만 이 씨는 공항에 도착해 수하물 코너에서 캐리어를 찾은 순간 깜짝 놀랐다. 캐리어를 끄는 손잡이 부분이 박살났고, 바퀴도 한쪽이 짓눌러져서 더이상 굴러가지 않았다. 큰 충격이 가해졌는지 캐리어 안에 있던 선글라스, 전기면도기, 노트북 등의 파손도 심각했다. 이 씨는 항공사 측에 보상을 요구했지만 캐리어를 제외하곤 선그라스, 전자면도기, 노트북 등은 약관상 수하물 탁송 제한 품목에 해당돼 보상받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망연자실했다.
최근 항공기 운송 서비스 관련 피해 민원이 급증하고 있지만 정작 여객운송약관에는 항공사를 위한 면책 내용이 많아 소비자 불만이 커지고 있다. 특히 수하물 보상의 경우 파손책임 및 피해금액 등을 입증하기 어려워 울며 겨자먹기로 항공사 측이 제시한 보상 조건에 따를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14일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항공운송서비스 피해 구제와 관련해 소비자원에 접수된 민원은 2012년 396건에서 2013년 528건, 2014년 681건 등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최근 2년간 70% 넘게 급증한 것.
소비자원에 접수된 민원은 최초 항공사측과 원할한 보상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차선책으로 진행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피해 사례는 더욱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중 수하물 관련 불만은 항공권 위약금, 운송 지연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현재 국내 항공사들은 수하물 지연 및 파손 또는 분실 신고를 특정 기한 내에 신고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신고를 해도 약관에는 항공사 면책사항을 두고 있어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대형 항공사나 저가 항공사 모두 대동소이하다.
우선 캐리어 파손의 경우 A항공사는 타사 제품으로 교환해주거나 동일한 제품의 인터넷 최저가에서 사용기간 등의 감가상각을 뺀 금액을 현금으로 보상해준다. 구매가보다 훨씬 낮은 배상에도 현지에서 당장 캐리어가 필요한 소비자의 경우 어쩔수 없이 이를 수용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더욱이 캐리어 안의 내용물을 보상 받는 경우는 거의 전무하다. 이는 약관에 명시된 귀책사항 때문이다. A항공사의 여객운송약관을 보면 ‘파손 또는 손상되기 쉬운 물품이나 노트북, 카메라 등의 전자제품, 화폐, 보석 등 기타 귀중품은 위탁 수하물에 포함하거나 접수하지도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책임 지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 같은 규정을 광범위하게 적용할 경우 웬만한 옷가지를 제외하고서는 운송 제한 품목에 다 해당될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수하물을 안전하게 운송해야 할 총체적 책임이 있는 항공사가 짐을 함부로 다뤄 파손이 발생했어도 소비자가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 밖에 없다.
이 씨의 사례처럼 경미한 손상이 아닌 큰 충격으로 캐리어는 물론 안의 내용물까지 파손됐어도 항공사는 면책 사유를 주장하게 된다. 실제 이 씨는 선글라스, 전기면도기 등의 파손은 물론 의류 등의 2차 손상이 발생했어도 전혀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 씨에 따르면 당시 보상 담당 직원은 “선글라스는 유리에 해당되고, 노트북과 전기면도기는 전자제품에 해당돼 규정상 보상할 수 없다”면서 “캐리어만 1년여 정도 사용한 점을 고려해 감가상각 30%를 적용, 구입가의 70%만 보상을 해주겠다”라고 전했다.
이 씨는 “노트북 파손의 경우 귀책사유에 대한 안내를 받아 수긍하지만 중요 소지품을 제외한 나머지 물품은 일반적으로 짐을 꾸릴 때 캐리어에 넣는 제품이 아니냐”면서 “캐리어가 파손될 정도면 상당한 충격이 가해졌다는 건데 그 파손 책임이 나한테 있다는게 말이 되냐”라고 분개했다.
이에 대해 A항공사 관계자는 “운송 제한 품목에 해당하는 경우 보상을 하지 않는게 규정”이라면서 “하지만 운송 제한 품목일지라도 항공사의 부주의로 인한 파손으로 확인될 경우 내부 검토를 거쳐 보상을 하는 경우는 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만약 내용물에 대한 보상이 이뤄진다 하더라도 흡족할만한 보상은 아니다. 약관상 금액에 상관없이 중량으로만 보상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국제여객운송약관을 보면 수하물 파손이나 분실의 경우 1kg당 약 2~3만원 정도의 한도로 배상 책임을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소비자가 무료로 실을 수 있는 수하물의 허용량은 1인당 20kg에 불과하기 때문에 최대 보상액은 40~60만원내에 그친다.
이에 소비자원에 피해구제를 신청해도 100% 원만한 합의가 어렵다. 분쟁 조정기구인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가 합의안을 내놓아도 법력 강제력이 없는 만큼 받아들이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소비자원에 접수된 681건 가운데 120건은 조정이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 소비자분쟁해결기준에는 일반·개인·용달화물 등의 운송사업자가 물품의 인도, 보관 및 운송에 관해 멸실, 훼손 또는 연착으로 인한 손해가 발생할 경우 운임 및 피해액을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박지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간사는 “운송 중 수하물 파손은 명백하게 항공사의 부주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전액 보상해주는 것이 맞다”면서 “하지만 항공사측은 불공정한 약관을 들어 소비자를 기만하고, 내부 보상 규정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알리지 않고 있어 보상도 천차만별로 행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는 항공사들이 약관을 근거해 수하물 파손 및 분실 보상을 진행하는 만큼 별 수 없다는 반응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항공여객운송약관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심사를 받는 부분이기 때문에 국토부가 약관에 대해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은 사실상 없다”면서 “다만 수하물 분쟁 등의 민원이 급증할 경우 서비스 평가 등을 통해 사업개선명령 등은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한 “이 같은 문제점을 인식해 올해 3월 TF팀을 구성, 올 연말까지 항공 소비자보호 전담팀과 항공 소비자 분쟁조정위원회를 신설하고 소비자 피해보상을 위한 합리적인 법적 기준을 만들 방침”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