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카카오톡
블로그
페이스북
X
주소복사

신당동 오자 육영수 여사 "남편이 머리 숙이면 안돼"

동성혜 기자
입력 2015.03.22 10:22
수정 2015.03.22 12:10

<김인만 작가와 '신당동 가옥'을 가다>대문부터 개조

"실제 유품 아닌 당대 물건 구해 전시, 유물 찾아야..."

서울 중구 신당동에 위치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옥.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서울 중구 신당동에 위치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옥 내 안방.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서울 중구 신당동에 위치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옥 내 자녀방.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당동 가옥이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가 시작된 17일 오후 시민들이 박 전 대통령 가옥을 관람하기 위해 줄지어 서 있다.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김인만 작가.(‘박정희 일화에서 신화까지’의 저자)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1958년 5월 16일 여기 신당동 가옥으로 이사하면서 육영수 여사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뭔지 아세요. 바로 쪽문만 달려있던 대문을 트는 일이었어요.”

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서울 중구 신당동 가옥(62-43)이 일반인에게 처음 개방되던 17일, ‘데일리안’은 ‘박정희 일화에서 신화까지’의 저자이자 본보에 ‘그리운 나라, 박정희’를 연재하는 김인만 작가와 동행 취재를 했다.

김 작가는 신당동 가옥에 대해 고 박 전 대통령이 5.16을 계획하고 성공한 것에 많이 초점을 두지만 사실은 육 여사의 집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실제 이사한 직후 집 명의도 육 여사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1974년 8월 15일 이후 박 전 대통령 명의로 바꿨다.

“셋방살이를 전전하던 육 여사가 적은 봉급을 쪼개서 적금을 부어 1956년 4월 23일 처음 마련한 집은 신당2동에 있던 집입니다. 그 집을 옛날 돈 320만환에 팔고 적금한 돈에 여동생에게서 꾼 돈을 보태 450만환을 주고 지금 이 신당동 집을 샀죠. 처음 이 집은 굉장히 낡은 목조건물이라 형편이 닿는 대로 고치고 다듬었고 육 여사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나무들을 정원에 심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육 여사가 집을 고칠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쪽문만 달려있던 대문을 트는 일이었어요.”

시인 박목월이 지은 ‘육영수 여사’에 따르면, 당시만 해도 두쪽 대문으로 만들어 한쪽에 작게 문을 뚫어 드나드는 사람이 머리를 숙이게 되어 있던 대문을 세쪽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유는 “출입하는 남편이 머리를 숙이면 안된다”는 육 여사의 생각이었던 것. 책에는 “(육영수) 여사님의 놀라운 창의력이 오늘날 주택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문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여성의 지혜와 힘, 조용한 놀라움을 동반하는 선견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 김 작가는 “신당동 가옥으로 이사한 날도 5월 16일인데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묘하다”면서 “아들 지만씨가 태어난 것도 이 집에 이사온 지 7개월후로 (고 박 전 대통령)가족들이 ‘좋은 집터’라고 즐거워하기도 했다는데 그만큼 육 여사의 내조와 내공, 은덕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제발 부엌에 물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살고 싶다”며 변두리 고갯마루로 이사

신당동 가옥의 위치는 꽤나 높은 곳에 위치했다. 지하철 2호선 신당역 5번 출구로 나와 대로변을 20여미터 걸어가다 첫 번째 골목에서 방향을 틀어 들어가면 시장이 들어서있다. 시장을 따라 쭉 올라가면서 어디쯤일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면 전신주에 이정표가 붙어있다. 이정표에 표시된 거리를 대충 계산하면서 가다보면 양옆으로 빌라들이 들어서 있고 완만한 오르막으로 되어 있다. 오르막길을 따라 가다보면 작은 골목길 교차로 오른편에 위치한 1층 양옥집이 바로 문화재청에 의해 2008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 박 전 대통령의 신당동 가옥이다.

지금이야 완만한 오르막길 위에 있는 단층집 정도로 보이지만 1958년 당시로 따진다면 서울시내에서도 좀 떨어진 꽤나 높은 지대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대해 김 작가는 “육 여사의 선택이었다”고 설명했다.

“고 박 전 대통령과 육 여사가 결혼해서 처음 산 곳은 대구 삼덕동입니다. 박 전 대통령이 군인이다 보니 소속 부대를 따라 대구에서 전라도 광주로, 서울로, 경남 진해로 해서 다시 서울로 올라왔지요. 지금 박근혜 대통령은 대구 삼덕동의 셋집에서 태어났고, 1954년 10월 박 전 대통령이 광주 포병학교장으로 전보 발령을 받아 가족이 다시 광주로 내려갔는데 그해 여름에 둘째딸 근영씨가 태어났어요. 이듬해 박 전 대통령은 5사단장으로 발령받아 강원도 양구로 갔고 가족들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 노량진에 셋방을 얻었습니다. 방에는 물이 올라오고 불도 들이지 않았고, 방에 비옷을 깔고 식구들이 눕지도 못한 채 밤낮으로 엉거주춤거렸고 근혜씨는 아파서 자주 울었다고 합니다. 그런 고생 끝에 1956년 4월 장충체육관 근처 충현동(오늘날 신당동)에 처음으로 ‘내집’을 마련했는데 집은 주위의 높은 집들로 에워싸여 저지대에 위치해 낮에도 전등불을 켜야 했고 비가 오면 이웃집 하숫물이 넘쳐 올라와 물난리를 겪었다고 합니다.”

고생 끝에 얻은 집이지만 몇 번 물난리를 겪고 나서 육 여사는 “제발 부엌에 물이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살고 싶다”고 해 2년만에 신당동 가옥으로 이사하게 됐다고 한다. 고 박 전 대통령과 육 여사는 신당동 가옥에서 3년밖에 살지 않았다. 5.16 이후 1961년 8월 16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관사로 이주한 것이다.

서울 중구 신당동에 위치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옥 내 서재에서 5.16 당시 박 전 대통령이 입었던 군용 점퍼와 모자 복제품이 전시돼 있다.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실제 유품 아닌 당대 물건을 구해 전시

검은색 세쪽 대문을 열고 들어간 집은 작은 마당이 있었고 대문 정면으로 박 전 대통령과 육 여사 부부의 입체물이 서 있어 방문객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배치했다. 마당으로 들어선 김 작가는 “생각보다 상당히 협소하다”고 했다.

집 내부는 응접실, 안방, 자녀방, 영상실(옛 부엌), 서재, 창고, 화장실로 구성돼 이었었다. 응접실에는 탁자와 7개의 의자, 찬장, 선풍기 등이 있었고 찬장 위에 시계, 석고상이 있다. 시계 옆에 ‘신이심정(神怡心靜)’이라고 쓰인 편액이 걸려 있다. ‘정신이 온화하면 마음이 고요해진다’는 의미다.

응접실에는 1961년 7월10일 방한한 미 육군 차관 스티븐 아일스의 부인과 외국 사절단 부인들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촬영한 사진이 전시돼 있다. 김 작가는 “국가기록원 사진”이라며 “서울시가 용하게 사진을 찾았다”고 했다.

“이 사진이 중요한 게 육 여사가 국가기록 사진에 최초로 나타나는 사진이에요. 또한 이 사진을 통해 신당동 가옥의 구조를 알 수 있지요. 사실 따지고 보면 당시 대통령이 윤보선 대통령이지요. 그렇다면 공덕귀 여사가 주인공으로 미 육군 차관 부인과 외국 사절단 부인들을 접대해야 하는데 육 여사를 찾아왔다는 것은 그만큼 박 전 대통령이 궁금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재미있는 일화 중 하나는 이렇게 외국 대사 부인들이 신당동을 찾는 일이 잦아졌는데 이들을 앉힐 의자가 부족해 이웃집을 돌아다니면서 의자를 모아 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경호병이 ‘사모님, 이제 되셨습니까?’하고 묻자 육 여사가 마루에 놓인 의자들을 둘러보면서 ‘각양각색이네요. 의자 전시장인가 보네’라고 답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검소하게 살았다는 말이죠.”

응접실 바로 옆 안방에는 고 박 전 대통령 내외의 결혼 사진, 육 여사의 배화여고시절 사진 등 사진 몇컷과 오래된 재봉틀 등이 있었고, 자녀방에는 책상 위에 교과서 등이 전시돼 있었다. 예전 부엌자리는 영상실로 꾸몄다. 부엌과 관련, 박목월 시인의 ‘육영수 여사’에 따르면 “마룻바닥을 뜯어내어 시멘트로 바닥을 깔고 손수 고안한 입식 조리대를 설치하였다”면서 “그 모든 것은 육영수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서재에는 책장과 군복이 걸려있다. 책장 안에 직접 쓴 글씨의 책자가 있어 해설사에게 물었더니 박 전 대통령의 친필은 아니고 당시 교편을 잡았던 한 선생님이 5.16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으로 적어둔 책을 전시한 것이라고 한다. 군복 역시 당시에 입었음직한 옷을 걸어놓았다.

김 작가는 “저 잠바는 그날의 잠바가 아니다”라면서 “5월 15일 11시45분에 여기서 출발할 당시 굉장히 추웠다고 하는데 야전잠바를 입고 나갔어야 맞다. 그런데 저건 아니다”라고 씁쓸해했다.

김 작가는 집안 내부를 구경하기 전부터 “유품이 걱정이다”라면서 “아마 실제 유품이 거의 없을 것이다. 중간에 이 가옥 관리자가 옮겨지면서 사실상 많이 유실됐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1979년 11월 박근혜 삼남매가 다시 여기 신당동 가옥을 올 때 아버지와 어머니 유품이 5톤 트럭이라 여기 저기 맡겼다고 했어요. 그리고 구미 출장소에도 한 수천점은 있었다고 하고 어린이회관에도 육 여사의 유품들이 일부 있어요. 아쉽죠.”

그의 우려대로 사실상 유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당대 물건을 구해 전시한 것이 대부분이다.

신당동 가옥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건국 6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역대 정부 수반 유적 복원 사업’의 일환이다. 서울시가 정부 예산 20~30%를 지원받아 시 문화재로 지정하는 한편 재단장과 공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김구 임시정부 주석의 경교장, 장면 전 총리의 명륜동 가옥, 최규하 전 대통령 서교동 가옥을 각각 복원해 일반 국민에게 이미 공개했고 향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이화장, 윤보선 전 대통령 가옥 등도 복원해 개방할 예정이다.

동성혜 기자 (jungtun@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댓글 0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