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한 국회' 통진당 해산보다 이석기 제명이 먼저였다
입력 2014.12.11 10:58
수정 2014.12.11 17:14
<기자수첩>겨우 윤리위 회부…문제는 대법 판결 '눈앞'
형 확정돼 의원직 박탈되면 45억 혈세와 제명안은 증발
국회 윤리특별위원회가 9일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에 대한 제명안을 윤리심사자문위원회에 회부했다. 제명안이 윤리특위에 처음 제출된 지 1년 3개월, 이 의원이 1심에서 내란음모 등의 혐의로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지 10개월, 항소심에서 내란선동 등의 혐의로 징역 9년을 선고받은 지 4개월 만이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올해 이 의원의 세비와 활동비, 보좌진 급여로 지출된 혈세만 5억여 원, 통합진보당 원내 의석이 5석으로 유지되면서 추가 지출된 경상보조금과 선거보조금만 40억여 원에 달한다. 윤리특위가 정치적 이해관계로 제명안 처리를 미루는 동안 지출되지 않아도 됐을 45억 원의 혈세가 증발했다.
하지만 제명안이 실제 본회의에 상정되기까지는 적어도 2개월의 시간이 더 소요된다. 이 의원에 대한 상고심 판결이 내년 초께 예정돼있는 점을 고려하면, 제명안 처리보다 의원직 박탈이 더 이른 시점에 이뤄질 수도 있다. 이 의원의 의원직이 박탈되면 굳이 국회 차원에서 제명안을 처리할 필요가 없다.
물론 1심과 항소심 판결만으로 유죄를 단정하고 제명안을 처리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 제명안 처리 후 무죄가 확정된다면 이미 의원직을 박탈당한 ‘전직’ 국회의원은 구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진보정당을 비롯한 야권 일각에서 이 의원에 대한 제명을 반대하는 논리도 이 같은 무죄추정의 원칙이다.
다만 애초에 제명안이 제출된 것은 이 의원의 유죄가 추정됐기 때문이 아니었다. 헌법과 국가체제에 대한 이 의원의 인식이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판단됐기 때문이다. 조직 행사에서 애국가가 아닌 적기가를 부르고, RO 회합에서 내란을 도모하던 모습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국회법 제155조와 제163조는 헌법 제46조 1항(청렴의 의무) 위반 등 12개 사안에 대해 경고, 사과, 출석정지, 수당삭감, 제명 등의 징계를 내릴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의원의 경우, 동법 제25조(품위유지의 의무) 위반인 동시에 징계 사유인 국회의원윤리강령과 국회의원윤리실천규범 위반에 해당한다.
결과적으로 윤리특위는 대법원 판결과 별개로 이 의원 제명안을 처리할 명분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정치적 이해관계를 이유로 혈세를 낭비케 한 것이다.
이 의원 제명안 처리가 지연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에 있다. 새누리당은 지난해 11월 제명안을 윤리특위에 단독 상정했으나, 새정치연합은 국회선진화법상 안건조정위원회를 구성해 제명안을 회부했다. 당시 새정치연합은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제명안 처리를 반대했다.
안건조정위 기간이 만료되고, 이 의원에 대한 1심 판결이 내려진 뒤에도 새정치연합은 제명안 처리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명분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무죄추정의 원칙이었다.
지난 4월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뒤에는 새누리당도 제명안 처리 연기에 동참했다. 6월 지방선거, 7월 재보궐선거가 예정된 상황에서 선거 ‘역풍’을 우려해 몸을 사렸던 것이다. 이후에는 하반기 원구성, 세월호 특별법 협상 등으로 제명안 이슈가 묻혀버리고, 윤리특위 전체회의도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통합진보당 해산이 급했던 게 아니었고, 이 의원의 유죄 확정이 급했던 게 아니었다. 헌재는 헌재대로, 법원은 법원대로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재판을 진행하고, 때가 되면 이 의원과 통합진보당은 법의 심판을 받는다. 하지만 제명안 처리에는 무엇보다 국회의 의지가 필요하다.
의원직 제명, 탄핵소추 의결은 사법적 판단에 따른 공직 상실과 다르다. 이는 죄의 유무를 떠나 헌법과 국회법에 명시된 국회의 권한이고, 형의 확정을 요하지도 않는다.
상당수의 공직후보자들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사법적 판단이 아닌 도덕성 결여를 이유로 낙마의 수모를 겪었다. 내정 무효, 국회의원으로 따지자면 당선 무효에 따른 의원직 상실이나 마찬가지이다. 행정부 수반이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로 직무를 정지당했다. 국회의 권위가 이렇다.
하지만 국회는 국회의원 징계에 대해서는 유독 엄격한 잣대를 들이민다. 자력구제 금지의 원칙을 존중하겠다는 것인지, 자신들이 제2의 이석기가 될까 두려워 불편한 선례를 만들지 않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본격적인 심사에 들어갔다고는 하나 이 의원 제명안 처리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 제명안이 처리되기 전에 대법원 판결이 이뤄져 이 의원이 의원직을 박탈당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다음이다. 여론의 눈치나 보는 새누리당, 형소법상 원칙을 내세워 국회의 권위를 스스로 훼손하는 새정치연합, 두 정당이 변하지 않는다면 유사한 상황이 또 벌어졌을 때, 그때에도 지금처럼 제명안 처리를 미뤄 또 수십억 원의 혈세를 낭비할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