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이르쿠츠크(Irkutzk I), 데카브리스트의 도시
입력 2006.09.05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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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쿠츠크(Irkutzk)는 러시아 12월 혁명을 주도한 데카브리스트
(Dekabrist)들의 정신이 살아있는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이르쿠츠크 공항에 비행기가 다다를 즈음, 앙가라강 양편으로 고색창연한 도시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눈에 들어온다. 러시아의 전형적인 건축양식과는 약간 대별되는, 오히려 서 유럽풍에 가까운 높지 않은 건물들은 앙가라강과 어울리면서 숨 쉬고 있다. 여러 색으로 칠해진 집들과 그에 어울리는 나무와 거리들, 여름이 지나가는 데카브리스트의 도시다.
바이칼을 가면서 호수를 제외하고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단어가 데카브리스트(Dekabrist)였는데 영어 발음으로 디셈브리스트(Decembrist) 즉 12월 혁명을 주도한 제정러시아의 젊은 장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바이칼을 포함하는 이르쿠츠크주의 주도인 이르쿠츠크가 현대적인 도시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던 이유는 테카브리스트 혁명, 1825년 2월 14일, 일어난 12월 혁명에 기인한다.
데카브리스트의 12월 혁명 장면을 담은 사진, 거사당일 실패로 끝난다
1812년 나폴레옹과의 러, 불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1814 년 프랑스의 파리에 입성을 해 승리를 했다. 프랑스에 진주한 러시아 군대는 약 몇 년간을 프랑스에서 지내면서 젊은 장교들은 프랑스의 시민혁명과 민주주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받으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들 젊은 장교들이 다시 러시아로 돌아온 후 아직까지 전 근대적 농노제도와 봉건주의 부정부패 그리고 가난한 농노들을 보면서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혁명을 꿈꾸게 되었다.
이들이 이미 봉건제의 와해과정을 통해 민주화의 길을 걷고 있던 서유럽에서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절대 군주 하에 고통 받는 러시아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그들의 이러한 현실적 고민은 알렉산더 1세의 사망에 뒤이은 니콜라이 1세의 즉위식 날인 1825년 12월 14일 입헌군주제와 농노의 해방 등을 주창하면서 반란을 꾀하게 만든다. 그러나 프랑스 시민혁명과 달리 일반 민중과의 연계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전에 모의사실이 발각되어 거사를 행하지도 못한 채 실패하고 거사당일 모든 데카브리스트 장교들이 현장에 체포되고 만다. 러시아판 ´앙시앙 레짐´의 타파 시도가 허무하게 끝난 것이다.
즈나멘스키 수도원에 있는 무명 데카브리스트들의 무덤
1917년 레닌에 의한 민중의 봉기로 일어난 10월 혁명이 짜르로 대변되는 절대 군주제가 폐지되는 ´아래로 부터의 혁명´이라면 12월 혁명은 귀족 계급에 의한 ´위로부터의 혁명´이라 말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서 유럽에서부터 세계전체로 민중의 자각, 봉건시대의 종말, 산업시대의 단초를 제공한 프랑스 시민혁명은 혁명적 부르주아지가 혁명을 주도하고 더불어 1789년 영주제적 제 권리의 폐지 선언을 낳았던 농민층의 봉기와 도시 민중을 대표하는 상-퀼로트의 도움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그렇지만 12월 혁명의 모의는 러시아의 역사상 최초로 짜르의 전제정치에 대하여 일격을 가한 사건으로 이를 통해 짜르의 절대적인 권위는 더 이상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국왕친정과 신권이론(神權理論)의 당위가 무너지는 결과를 낳아 나중의 10월 혁명을 가능하게 한 역사적 단초가 된다.
12월의 실패한 혁명은 데카브리스트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 혁명 실패 후 약600 명의 장교로 이루어진 데카브리스트들은 황제에 의해 직접 신문을 받고 혁명 주동자 5명은 교수형으로 처형되었고 나머지는 코카사스와 전쟁에 노예병으로 강제로 투입되어 죽거나 약 120 명 정도는 모든 재산과 권리를 박탈당한 채 노예의 신분이 되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영하 40도의 강추위에 폭풍한설이 몰아치는 길을 발목에 쇠사슬이 감긴 채 1년을 걸어서 오는 길에 대부분이 죽고 20여명 조금 넘는 이들만 살아서 이르쿠츠크에 도착한다.
이들은 강제 노동에 처해 졌으며 이곳에서 한동안 아주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사망했으며 이들이 황제의 특사로 1856년 해방되었을 때 남은 사람은 불과 반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이들 중 45명은 다시 귀환을 했지만 그들도 모스크바나 성페테르부르그의 도시에 사는 것은 금지되었다.
데카브리스트 박물관, 트루베초코이의 집
데카브리스트 혁명의 최고 지도자였던 트루베초코이도 1825년에 이곳으로 유배된 뒤 복권이 되어 1856년 성페테르부르그로 돌아갈 때까지 땅을 파는 노동을 했으며 이르쿠츠크 시절 마지막 11년을 살았던 집이 또 다른 데카브리스트였던 발콘스키의 집과 함께 현재 데카브리스트박물관으로 남아있다.
트루베초코이의 집은 1970년 10월 29일 박물관으로 개관했는데 이르쿠츠크 지역의 전통적인 목조가옥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보수나 개축 없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당시의 체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다. 지하의 오래된 창틀에 적당히 먼지가 쌓이고 오래된 나무계단의 가파른 경사에서 데카브리스트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더불어 그들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사용했던 도구들과 잠을 잘 때도 발목에 차고 있었다는 쇠사슬을 보는 것으로 그들이 감내했을 회한과 고통의 무게를 가늠해 본다.
1층 맨 왼쪽 방에는 발콘스키와 트루베초코이가 사진으로 살아남아서 그들을 묶었던 쇠사슬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의 러시아에서 박물관으로 만들어져 기념되는 그들은 정신적으로는 죽어서야 복권이 된 것이리라 여겨진다. 중앙 트루베초코이의 서재를 가는 길목에는 들을 격려하기 위해 러시아의 시인 푸쉬킨이  보냈다는 친필 편지도 볼 수 있는데 이곳을 관리하는 할머니 한 분이 푸쉬킨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키며 영어로 ´Great Poet라고 나직이 일러준다.
왼쪽부터 트루베초코이와 발콘스키의 초상
가운데 방은 비교적 넓고 크다. 북쪽으로 난 창가에는 트루베초코이의 책상이 소박한 모양으로 남아 있는데 특별할 것 없는 그런 것들이 귀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들의 시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부인 에카쩨리나 트루베츠카야 가 쓰던 방에는 극비리에 여동생에게 보냈던 앨범이 전시되고 있다. 이 앨범에는 당시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림들과 정물화 자수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데카브리스트들의 아내들이 그리고 서명했던 이 그림들은 아름답고 정갈하다. 러시아 귀족 여인들이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유배지에 와서 평민의 삶을 살면서도 어떻게 어려움을 긍정적으로 극복하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들 귀족 청년 장교들의 부인들은 황실로부터 국가에 반역한 남편을 버리고 귀족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재가를 하든지, 아니면 귀족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버리고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든지 선택하라는 명을 받는다. 그러나 거의 모든 부인들은 남편을 따라 같은 운명을 선택하여 유형의 길을 나서 꼭 같이 추위에 떨며 이곳에 온 사람들이다. 이런 면에서 이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봉건주의 말기에 해당하는 서 유럽의 귀부인, 예컨대 마리 앙뜨와네뜨로 대표되는 관념적인 여자들의 사치성과는 질적으로 틀린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절제와 이성적 사고가 몸에 익숙한 이들 부인들의 생활상은 그 후에도 귀감이 되고 있다.
에카쩨리나, 남편 트루베초코이를 따라 시베리아로 맨 먼저 달려왔던 사람이다
그중 트루베츠코이의 부인 에카쩨리나는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맨 먼저 달려왔던 사람이다. 따라서 그녀의 이름은 가장 많이 알려진 데카브리스트 부인중의 한 사람이었고 결국 그들의 주 생활지였던 성페테르부르그로 돌아가지 못하고 시베리아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의 묘는 무명의 데카브리스트 두 명과 함께 이르쿠츠크의 즈나멘스키 수도원에 묻혀있다.
방 바깥에는 트루베초코이가 이곳 시베리아로 유형을 올 때 짐을 담아왔던 큰 가방 하나가 놓여있다. 둔중한 가방 무게만큼의 고뇌를 안고 왔으리란 짐작을 하면서 가방은 세월이지나 복권이 되는 날, 나아가 죽는 날까지 저 가방에 다시 짐을 싸고 고향 혹은 상페테르부르그로 돌아갈 희망의 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트루베초코이의 여행가방, 그들의 무거운 삶을 보여주는듯 하다
한겨울, 눈이 쌓이는 겨울이 가장 긴 이곳에서 고적한 냉기에 정상적인 사람도 음울한 기운으로 몸이 움츠려 들것인데 모든 지위와 권위를 박탈당한 데카브리스트들이 겨울을 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반 지하의 공간에서 밖으로 내다보이는 오래된 창문 앞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르베초코이 부부의 삶의 족적을 더듬어 보건데 끝까지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았으며 일관된 삶의 진정성을 유지하려 노력했었다는 흔적들을 볼 수가 있었다.
발콘스키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 톨스토이의 삼촌이며 소설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 세르게이 발콘스키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발콘스키는 1805년까지 그는 기마병으로 프러시아와 핀란드에서 50번 이상의 전투에 참가해서 빛나는 전과를 올려 24살의 나이에 그는 연대의 연대장까지 승진을 했으며 1810 년에는 터키와의 전투에도 참가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1812년에 그는 기병대의 캡틴으로 승진했고 1820에 아름다운 마리아 니콜라에브나와 결혼했다.
데카브리스트 박물관, 발콘스키의 집
시베리아에 유배된 데카브리스트중의 한 사람이었던 그는 후에 이르쿠츠크 북쪽 30여km 떨어진 조그만 마을에 정착한다. 1845년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이사하면서 살고 있던 목조 주택을 이르쿠츠크로 옮긴 후에 재조립하여 1847년부터 1856년까지 9년 동안 이 집에서 살았다. 발콘스키가 성페테르부르그로 돌아 간 후 한 때는 고아들을 위한 학교로 운영되기도 했으며 1985년에 데카브리스트 발콘스키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이곳은 트루베초코이의 집과 달리 많이 고쳐 원형 그대로 복원하였다고 하나 그들의 체취가 묻어나지는 않지만 당시 러시아 귀족의 삶의 한 단면을 볼 수가 있다.
발콘스키가 살던 당시 이 집은 이르쿠츠크에서 유명한 사교 장소였으며 문인들이 모여 시 낭송을 하거나 명망있는 연주가들을 초청하여 음악회를 갖기도 하였다. 그 전통을 이어서 지금도 문학 작품 발표회나 연극 등이 공연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젊고 아리따운 러시아의 현지 해설사가 설명을 한다. 화려한 실내의 장식이나 각종 가구, 프랑스풍의 인형과 각종 장식들, 발콘스키의 후손들이 데카브리스트들을 기념하여 지금까지 행사를 하는 사진들과 자료들, 1층 방에 있는 당구대, 독일에 한 대 있는 것을 포함해 세계에서 2대 밖에 없다는 피라미드형의 포르테피아노 등을 통해 그들이 가지는 문화적 식견을 한눈에 볼 수가 있다. 그렇다고 발콘스키가 이런 문화적 유희에만 빠져있었던 것은 아니다.
발콘스키의 서재에 있는 그의 오래된 의자
발콘스키는 치타지역으로 추방된 후 그 지역 농민들과 함께 농사를 지면서 새로운 경작법을 개발하고 가르쳤다. 농노에서 사면된 후 농업에 대한 관심을 계속해 그의 재산의 많은 부분을 농업에 투자하였다.
2층 발콘스키의 방에 가면 가운데 오래된 가죽의자 하나가 놓여있다.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는 러시아 정교회의 돔이 보이고 마당의 풍경이 보인다. 긴 세월 시베리아의 생활에서 그의 정신을 지배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오히려 유배시절을 보내면서 자유의지에 의한 혁명이나 세상의 인위적 변화보다 시베리아라는 자연의 위대한 현상을 보면서, 농사나 노역을 통해 인간의 당위적인 운명론에는 좀 더 관심을 두지 않았을까?
발콘스키의 아내 마리아가 쓰던 피라미드형의 포르테피아노
발콘스키를 말할 때는 항상 함께 거론되는 톨스토이와 푸쉬킨 그리고 발콘스키 부인 마리아 이야기가 있다. 특히 톨스토이는 삼촌 발콘스키의 삶을 통해 전쟁과 평화 3권을 완성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한 발콘스키보다 열일곱 살이나 연하였던 그의 부인 마리아가 처녀시절에 유명한 시인 푸쉬킨과 열렬히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부모의 반대로 결혼을 하지 못하고 노총각 발콘스키에게 시집을 왔다고 한다. 포르테피아노가 있는 마리아의 방에는 그녀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발콘스키의 아내 마리아의 초상
자수와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마리아의 초상화에 나타난 모습은 어둡고 날카로운 모습이다. 세상의 풍파를 겪으면서 귀족적인 부드러움은 사라지고 길어진 눈매에 병색이 완연하다. 그러나 체념한 얼굴은 아니고 나 같은 범부가 마주하면 그녀의 보이지 않는 힘에 주눅이들 것도 같다. 실제 마리아는 일기에서 나와 남편의 진정한 삶은 시베리아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서로를 의지하지 않고는 버티기 힘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나눈 두 사람의 끈끈한 사랑을 표현한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리아는 병으로 1862년에 발콘스키는 1865년 한 겨울에 죽음을 맞이한다.
나는 트루베초코이나 발콘스키를 보면서 당시 우리 조선의 지식인이었던 실학자 정약용을 생각한다. 다산초당을 짓고 실사구시의 학문적 토대와 지평을 끝없이 넓혀간 그의 행적은 늘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었음을 반분한다. 또한 유배지에서도 초의선사에게 차를 보내달라고 떼를 쓰는 편지가 절절한 추사 김정희를 문득 떠올린다. 금석문의 대가이자 제일의 명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학적 사고로 과학과 성리학 모두 당대 제일의 천재에 대한 애도를 한다. 아니면 갑신정변으로 3일 천하의 혁명을 기도했던 김옥균이나 박영효를 기억한다.
한 인간의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유한한 삶의 과정을 엮어나가는 방법은 사람마다 틀린다. 트루베초코이나 발콘스키의 정치적 신념이 편안해도 될 자신의 귀족신분을 뛰어넘어 봉건적 짜르 정권에 대항했다는 말은 그들의 기득권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들의 삶에 녹녹치 않은 가치를 부여할 수가 있다. 더하여 혹한의 시베리아에 와서 개척한 문화와 더불어 사는 삶의 형태는 여름, 시베리아에 핀 꽃처럼 아름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