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악봉수 복원한걸 보고 겸재 정선이 경악하다
입력 2014.03.30 10:16
수정 2014.03.30 10:17
<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한성부 소속의 마지막 횃불선이 엉망되다니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안산(296m)은 모양이 말안장처럼 생겼다해 길마재로 불렀으며, 이산 정상에는 호국유적인 봉화대가 있어 봉우재로 부르기도 했다. 역사적으로는 조선인조 1624년 이괄의 반란으로 반란군과 교전이 있었으며, 6.25 한국전쟁 때도 서울 수복을 위해 격전이 치열했던 곳이다.
안산에는 70m의 거리를 두고 2개의 봉우리가 마주보고 있는데 국내에서 유일하게 산 하나에 2개의 봉수대가 설치돼 있다. 이곳에 봉수가 축조된 것은 조선시대 초다.
동쪽 봉수는 평안도 강계에서 출발해 산을 타고 넘으며 남쪽으로 내려와 고양 독산봉수대를 거쳐 온 제3노선이며, 서쪽봉수는 평북 의주를 출발해 서쪽해안을 따라 고양 고봉산봉수에서 접선한 제4노선이다. 두 봉수는 한성부소속의 마지막 횃불선으로 목멱산봉수와 함께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축제행사로 복원한 정체성 잃은 무악동봉수ⓒ최진연 기자
현재 봉수시설물은 일제 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모두 파괴됐다. 동 봉수는 서울정도 600년 기념 이벤트로 사용하기위해 1994년 연조하나와 방호벽을 복원했는데, 조선시대 내지봉수의 필수적인 4개의 연조(횃불을 피우는 굴뚝)를 쏙 빠뜨린 채 세웠다. 즉 정확한 고증절차도 없이 정체성을 잃은 엉터리 복원이 되고 말았다.
마주보이는 서봉수는 1960년대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현재까지도 접근이 불가능해 유적의 실태조차 파악이 어렵다. 봉군들의 건물자리는 두 봉우리 사이 즉 말안장처럼 움푹 들어간 곳으로 추정되며, 군사들은 이곳에 주둔하면서 양쪽의 봉수대를 관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봉수대를 감싼 복원한 방호벽ⓒ최진연 기자
무악봉수는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등장했을 정도로 절경이었다. 그가 양천 현령으로 재임할 당시 강 건너 무악의 저녁풍경을 보며 그린 실경산수화 한 폭이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경교명승첩‘에 있다.
봉수 아래는 서울사람들에게 숱한 애환이 남아있는 무악재가 있다. 이 고개는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홍제동으로 넘는 고개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 사람들이 모여 단체로 넘었을 정도로 험했다.
마주보이는 무악서봉수 터ⓒ최진연 기자
산 아래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총본산인 봉원사가 있다. 이 절은 극락왕생을 비는 영산재로 유명하다. 대웅전에서 안산정상으로 가는 등성이에는 정성껏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치성바위가 있다. 높이 2m 정도의 이 바위는 서남쪽을 향해 있는데 ‘까진바위‘로 부른다.
생김새가 마치 검은색을 띤 남성의 성기모양이다. 앞쪽은 핏줄처럼 선줄이 바위 위에서 아래로 흘러있다. 머리 부분에는 굵은 테가 둘러져 있어 보기에도 남성이 발기된 상태로 보인다. 기자가 사진을 찍고 있는데 등산 온 여성들이 낄낄대며 힐끗힐끗 흘겨보며 지나간다.
안산 중턱의 성석 까진바위ⓒ최진연 기자
자연의 섭리는 참 묘하다. 까진바위 하단은 영락없는 여성 엉덩이다. 주변에 있는 바위에도 인위적인 구멍이 수도 없다. 성혈(性穴)로 부르는 이 구멍은 무수한 세월동안 여성들의 한 맺힘이 뚝뚝 떨어져 있다. 이 암반 꼭대기에 봉수대가 자리 잡았다.
동봉수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으나 어떤 곳은 산세가 가파르다. 가장 안전하고 완만한 등산로는 봉원사에서 출발하는 코스다. 내려오는 길에 우리민족의 자존과 자주정신을 일깨워주는 서대문형무소가 있다. 함께 둘러본다면 더없이 좋은 역사 탐방코스가 된다.
정상에서는 청와대와 북악산, 남산 등 서울의 도심이 거침없이 조망돼 인근지역 주민들의 등산코스로 그만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못생긴 봉수대에는 관심이 없고 도심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만 정신을 쏟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