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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말했다 "심청이는 효도한게 아니야"


입력 2012.09.3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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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나라, 박정희>생전에 인형극 보며 "아비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

흉가를 나오며 박근혜는 "아버지 매도되는 세상에서 내가 행복할 수 없어"

고개 숙인 박근혜가 5.16과 유신이 헌법 가치를 훼손했다고 어쩌구저쩌구하던 그날 나는 목구멍으로 넘긴 소주가 자꾸 눈을 적시고 속에서 불덩이가 대포알처럼 솟구쳐올라 박근혜 측근 한 사람에게 전화 걸어 무슨 일을 그 따위로 하느냐고 쌍욕을 퍼부었다. 서로 안다면 알고 전혀 모르는 사이는 아닌데 까놓고 천박한 욕설을 싸질러대는 그날 나는 평소의 멀쩡한 내가 아니었지만, 뭐가 다르랴, 사람 사는 게 거기서 거긴데.

입안으로 집어넣어도 자꾸 눈밖으로 흘러나오는 소주가 험한 세상 눈에 띄는 인간들과 온갖 것들 중에 변함없는 딱 하나의 내 친구라는 믿음이 오달지게 내 가슴에 꽉 들어차 출렁거렸다. 새털같은 나날 부대낌의 아픔과 괴로움과 외로움을 달래주고 씻어주고 또 힘을 부추겨주는 그 한 모금 한모금이 고마워 소주병 앞에 한참을 고개 숙이고 이 생각 저 생각 속을 헤매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만들어 넣으려 할 때마다 먼저 다가서는 위선(僞善) 앞에 멈칫거리게 됨에 어쩔 수 없이 내 푼수를 적당히 처바르면서 머릿속 생각들을 알량한 문장력에 짜맞추어 풀어놓는 짓거리가 길거리 동냥 같은 처량함이어도 그것을 한 모금의 소주가 달래주니 그지없는 고마움을 무엇에 비하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그렇게 영욕(榮辱)을 역사에 맡겨버리고 저 세상으로 돌아앉은 박근혜 아버지를 팔이 안으로 굽는 식으로 그 딸이 말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라 헤아려지긴 해도 아버지를 비난하는 소리에 고개 숙일 줄은 정말 예전엔 미처 몰랐던 것이다.

내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박근혜 아버지의 모습을 박근혜가 책에 공개한 적이 있다.

청와대 안주인이 돌아가시고 없는 가족들이 어느 하루 텔레비전의 인형극 ‘심청전’을 보았다고 했다. 공양미 삼백석에 심청이 팔려가고 심 봉사가 어쩔 줄 몰라 울부짖는 장면에서 박근혜 아버지가 불쑥 말하기를 “저렇게 하는 것이 진짜 효도가 아니야. 저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하더라는 것이었다. (박근혜 일기, 1977년 6월 23일)

심청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고 인당수에 몸을 던지지만, 딸 없는 세상에 혼자 눈을 뜨고 살아갈 그 홀아버지에게 무슨 행복이 있을 것이며 따라서 공양미 삼백석에 죽음을 바꾸는 것이 과연 효도냐 하는 되물음이었다.

아이들 책에서도 공양미 삼백석을 심청의 효도로 가르치고 만고풍상 겪을 만큼 겪은 인생 주름살들에도 옛가르침이 그냥저냥 멈추어 있는데 박근혜 아버지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생신 술을 따르는 박근혜. 1978년 11월 14일 박근혜 아버지는 설악산에서 마지막 생신을 맞았다. ⓒ 국가기록원

돌아가신 어머니 일을 대신 맡아 하느라고 여기저기 다니는 박근혜가 돌아오지 않으면 아버지는 밥을 안먹더라고 했다. 꼭 기다렸다가 함께 먹더라고 그때 가까이서 본 청와대 비서관은 말하고 있다.

그러던 아버지마저 여의고 박근혜는 “저희 부모님은 자식들이 효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은 채 너무도 일찍 저희 곁을 떠나셨다”고 말했다.

부모님을 여읜 청와대 그 흉가(凶家)를 나와 박근혜가 오랜 침묵과 은둔의 세월을 건너오면서 저 세상의 아버지에게 온갖 악담을 퍼부어대는 이 세상 앞에 다시 모습을 나타내었을 때는 젊은날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고 없는 ‘애어른’(박근혜가 자신을 표현한 말)이 되어 있었고, 그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매도당하는 세상에서 난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자식으로서의 도리가 그러하고, 또 결코 그 자신도 대통령 아버지를 깔아뭉개려 드는 잡소리에 결코 짓밟혀 살지 않겠다는 모진 마음다짐이었을 것이다.

물론 박근혜 개인의 도리와 정치 판단은 다른 것이다.

좋든 나쁘든 세간에서는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헌법 가치를 훼손했다고 어쩌구저쩌구하면서 고개 숙인 그날의 박근혜는 고개 숙이지 않는 꼿꼿한 아버지의 딸 모습이 아니었다.

‘헌법’이라는 말에는 그것이 최고이고 최선의 엄격함이요, 따라서 국가 구성원이면 그 앞에 누구도 거슬리는 짓거리를 해서도 안된다는 시퍼런 서슬이 도사려 있다. 역사 흐름에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 상관없이 어떤 경우에도 결코 부정해서는 안되는, 과연 헌법이 그럴까. 아니다. 나는 아니다. 사람 나고 헌법 났지 헌법 나고 사람 난 게 아닐진대, 요는 사람이다.

저잣거리 남정네나 아낙들간에 말다툼이 벌어질 때, 골목 아이들이 놀다가 엇갈려 다툴 때 흔히 하는 말이 있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사람이 살아가는 법이다. 상식과 도덕, 양심, 그리고 사랑과 미움의 잣대로 만들어진 ‘살아가는 법’이다.

‘심청전’을 보는 박근혜 아버지의 마음으로 심청에게 “아버지는 어찌 살라고 그렇게 죽어버리는 법이 어디 있어?”라는 물음도 같다.

사람이 살아가는 법에는 어떻게 살까, 어떻게 한번 사람답게 살아볼까 하는 소망이 담겨 있다.

하루 세끼 입에 풀칠하기가 죽기보다 어려워 사람이 사람답지 못한 지지궁상은 아랑곳없이 감투 쓴 자들은 갖가지 부패비리에 엉겨붙어 딴세상에서 희희낙락 거들먹거리는 꼬락서니의 나라, 힘 없으면 강한 자에게 먹히고 마는 냉엄한 지구 땅거죽에 비참하게 버려져 있던 그때 거렁뱅이 나라의 절망을 박차고 나온 사람이 박근혜 아버지였고, 그게 5.16이었다.

5.16이 헌법을 짓밟았다고?

무능 부패한 정치 권력에 들러리서는 헌법이라면, 그게 뭐 말라 죽은 헌법인가. 이 땅 목숨붙이들의 절망을 외면하고 굶주린 자의 입에 떠넣어주는 밥 한 숟갈만도 못한 그런 정치 권력의 헌법이라면 쓰레기에 다름 아니다.

내가 법을 가지고 먹고 사는 법통(法通)은 아니지만 따지고 보면 헌법이란 것도 ‘사람 사는 법’에서 나왔고 그것으로 국가경영의 틀거지를 갖추어 국가 구성원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권리를 요목조목 말해주는 것이로되, 어찌 그것이 만고불변의 절대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한줌도 안되는 한때 정치 특권층의 전유물로 보아 짓밟았다고 하는가 말이다.

권력은 특권층이 즐기는 놀음이 아니다. 국가와 국민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지지 못하는 권력은 죄악이고 단죄되어 마땅하다. 나라가 오죽했으면 군사 몇천명이 한강다리를 넘어왔다고 국군통수권자 이하 그 잘난 감투를 쓴 나으리들이 죄다 달아나 숨어버렸으랴.

역사는 힘의 충돌과 흥망으로 점철되어 있다. 기운이 쇠한 곳에 새 기운이 나오고 약한 세력이 강한 세력으로 교체되는 사건들에 의해 새로운 지평이 갈마들면서 역사는 발전해 왔다. 그리고 항상 새로운 국가 세력은 그 시대의 여망에 따른 과업을 수행해 그 성과로써 정의를 획득함으로써 정당한 역사 평가로 자리잡게 되는 것을 이성계의 조선왕조 건국이라든지 미 합중국의 독립 등등 얼마든지 볼 수 있지 아니한가 말이다.

5천년 역사의 대한민국을 기적처럼 환골탈태시킨 혁명의 첫걸음 5.16과 그리고 유신이 뭐 어쨌다고 고개를 숙인단 말인가. 5.16이 없었으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가능했겠느냐는 한마디 판가름 앞에 그래도 아니라고 부정하는 오사리잡것들의 군시렁거림은 내버려둬도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시들어꼬부라지게 되어 있다.

그게 역사 경험의 교훈이다.

글/김인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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