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 교복자율화세대의 울분을 토하다
입력 2011.06.05 11:24
수정 2013.05.22 15:25
<김헌식 칼럼>끼인 세대로서 개성과 자존감을 중시 ´성공과 향유´가 코드
영화 <써니>의 흥행 요인을 정리할 때 복고 코드라는 분석이 많다. 학창시절의 추억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있는 지적이다. 나미의 '빙글빙글', 보니엠의 '써니', 기차여행이나 음악다방, 그리고 최루탄과 가두시위 등은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말해준다. <위험한 상견례>에서도 복고코드를 차용하여 대중적 흥행을 이루어냈다는 점은 추억의 상품성을 충분히 입증한다.
영화 <위험한 상견례>와 <써니>의 공통점은 80년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다만, 써니는 그동안 잘 다루지 않았던 세대를 다루고 있다. 그 세대는 지금 21세기 문화지형도를 움직이고 있는 이들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대중영화에서 사회문화사적으로 잘 부각되지 않았다. 교복이라는 상징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세대를 다룬 복고영화에서 학생들의 이미지는 검정교복으로 굳어져 있다. 심지어 80년대를 배경으로한 영화에서도 이런 교복은 빈번하게 노출된다. 그렇지만 1982년 교복자율화조치가 이루어지면서 1983년부터 학생들은 교복을 벗어던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검정교복대신에 캐주얼 복장으로 등교한다. 이른바 교복 자율화세대가 등장한다.
교복의 폐지는 다양한 개성 발현의 기회를 박탈한다는 취지에 따른 것이다. 신군부 군사독재정권이라 불리는 제5공화국에서 이런 조치가 내려지는 것은 아이러니라지만, 이미지 쇄신이라는 점에서는 유효한 전략이기도 했다. 1982년의 야간통행금지 폐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교복자율화는 그 민주적 교육 가치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논쟁의 도마에 오르내린다.
학생과 비학생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고 학교와 경찰의 통제력을 잃게 해 탈선을 조장한다는 주장이 비등했다. 87년 610 민주항쟁을 겪으면서 오히려 일선학교에서는 교복을 학생들에게 착용시키게 된다. 90년대 초반에 웬만한 학교에서는 교복을 지정한다. 이로써 교복자율화론자들은 입지를 잃게 된다.
영화 <써니>는 짧고도 길었던 교복자율화 세대 여고생들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 교복자율화 세대 여고생들은 이제 중년을 넘어섰지만 그동안 검정교복에 밀려 소외되었다. 이전 교복세대와는 다르게 헤어와 패션, 화장에 대한 관심이 크고 스타와 노래, 영화, 잡지 같은 대중문화매체에 더 적극적인 세대이다. 영화 속 7명의 여고생들은 작가와 미스코리아를 꿈꾸고 성형과 헤어패션, 댄스와 음악에 빠져있다. 대한민국의 대중문화가 지금 한류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교복자율세대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자율성과 창조성을 중요하게 지향하는 것이 교복자율화의 근본취지이기 때문이다. 이전의 386세대가 검정교복세대로 통제받은 중고등학교 경험으로 정치지향적이라면 교복자율화세대는 교복없이 캐주얼 룩으로 중고등학교시절을 보낸 상대적으로 자율과 다양성의 문화적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은 이 교복자율화세대가 대학에 진입하면서 더욱 강력한 학생운동의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본질적으로 자신들의 개성과 문화적 취향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한국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시작한다. 예컨대, 서태지나 박진영은 모두 교복자율화세대로 중고등학교를 보냈다. 문화인의 젊은 주력꾼들이 그렇다.
영화에서 보여지듯이 이들은 개성과 자존감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들은 사회와 가족과의 갈등을 일으킨다. 단순히 사회를 전복시키거나 혁명을 꿈꾸지는 않는다. 일정하게 사회문화의 문화적 향유를 받고 자란 세대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이 꿈꾼 것은 바로 자신들의 성공이고, 사회적 향유였다.
영화에서 <써니>의 멤버들의 행복한 삶을 지켜준 것은 가족도 국가도 아니었다. 춘화라는 친구였다. 춘화는 가족도 없이 성공한 사업가였고, 자신의 재산을 친구들에게 나누어준다. 친구의 실적을 올려주고 재산을 불려주는가하면, 평생 할 일을 보장해주고, 재활을 도와준다. 나미(유호정)와 진희(홍진희)의 삶은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는 이들의 삶은 성공하지 않다. 그들이 여성이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끼인 세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율과 창조성을 지닌 세대이지만 사회적 기득권을 미처 구가하지 못하거나 그것에서 배제된 교복자율화세대의 소외성을 추억과 복고코드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영화가 <써니>이다. 그들에게 믿을 것은 이제 가족의 전폭적인 지원도 아니고 국가의 복지정책도 아니며 자신들의 힘으로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그들의 사회적 우울을 낳았지만, 한편으로는 춘화와 같이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의 결과는 낳을 수도 있었다.
386세대와 달리 그들은 개인의 행복과 가치의 실현을 중시하고 돈과 물질에 대한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오로지 혼자 차지하겠다는 개인주의적 욕망이 아니라 친구라는 집단적 욕망으로 풀어내고 있다. 개인의 욕망적 성취만을 강조하는 작금의 사회코드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열광을 낳을 만한 점이다. 그렇게 교복 자율세대의 풍경은 이렇게 지금의 현실적인 문제와 고민에서 별개될 수 없는 실제성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영화 <써니>는 단순히 복고코드로만 볼 수 없는 점이 있을 것이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
